마태복음 강해(33) - 참된 경건의 모양 (마 12:1-21)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7-8).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3). 하나님이 여섯 날 동안 창조의 일을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구별하여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는 날로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기에 주신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순종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식일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 속한 것입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지킴으로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옛 언약에 속한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에서의 안식일과 같은 모든 절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신약 시대의 성도는 제사나 절기와 같은 율법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인 주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행 20:7) 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 매일이 거룩하며 안식의 날입니다. 그러나, 안식후 첫날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서 매주일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안식일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의 변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참된 경건은 자비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시다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은 일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라고 정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정죄한 이유는 자신들이 만든 규율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자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단지 종교적인 규율에 갇혀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 규율을 만들어 지키게 했고, 자신들의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였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향해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예수님을 그들을 말씀으로 깨우치셨습니다.
주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아히멜렉 제사장이 있던 놉에 가서 성전의 진설병을 먹은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전인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어야 하는 진설병을 다윗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먹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급하게 사울을 피하느라 놉까지 오는 길이 무척이나 힘들었고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배고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사장이 아니지만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먹은 진설병에 대하여 성경은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잘못된 의도로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배가 고픈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먹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은 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진설병을 새것으로 바꾸고 (레 24:8). 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은 허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민 28:9-10). 이때 주님은 성전보다 크신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6). 성전보다 크신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했습니다.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헤롯이 만든 성전보다 더 소중하고 거룩한 분은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배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8).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배고픈 자가 추수할 때에 이삭을 취하는 것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삶의 특징은 의식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삶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삶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삶은 사역의 활동이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1: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비는 곤경에 처한 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구덩이에 빠진 자를 건져주며 낙심한 자를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종교적인 생활이 찾아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장했지만, 율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율법에 자신들의 해석을 추가하여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과 같이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도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설프게 알면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행동에 대하여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면 알수록 비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2. 참된 경건은 영혼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고소하기 위하여 질문을 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2:10). 그러자 주님께서 비유로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 12:12)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아픈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이 아픈 자의 고통이나 아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서 손이 아픈 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가에 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사람이 양보다 더 소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인간적인 규율에 매인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사보다는 자비가 더욱 소중하다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과 같은 관점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규율은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음식을 넣어 주며, 만일 동물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그 동물을 끌어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안식일에 양을 웅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이 합당하거늘,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더욱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참된 율법의 정신이 죽게 된 자를 살리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도망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규율로 죽은 자가 부정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죽음의 위험에서 살려줍니다. 광야는 어두워지면 들짐승이 다친 자를 공격할 수도 있고 광야의 추위가 죽게 된 자의 남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당한 자를 위하여 희생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주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고 물으실 때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율법의 정신이 사랑으로 곤경에 처한 자를 도와주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생명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죄인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즉,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기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분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려놓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상한 영혼과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주님은 고통과 시련으로 인하여 고통하는 인간을 향하여 상한 갈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가 견고하게 다시 서도록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인생의 소망을 잃어가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꺼져가는 인생에 다시 불을 붙이셔서 활활 타오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참된 경건의 모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 23:23).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되리지만, 율법의 진정한 가치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의는 정의(justice)를 의미하며, 인은 자비 (mercy)이며 신은 신실한 믿음(faithfulness)입니다. 즉, 하나님이 율법에서 보여주시는 영적인 가치인 자비와 공의와 신실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물질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행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믿음의 신실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일이 거룩히 구별된 날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육체적인 쉼을 갖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이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나누고 아픈 자를 찾아가 위로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삶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재권이란 그리스도를 삶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규율과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보다 더 우선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율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 보다 크신 그 날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우리의 삶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충성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이 세상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율법적인 고정관념을 피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삶은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려내는 태도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입니다. 특히 성경을 자신의 주관대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려는 실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종교적인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 믿음이 연약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더 이상 음식이나 날에 매이지 말아야 하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유대인들을 정죄하였고 유대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배경을 가진 성도들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서로에 대한 배경과 고정관념으로 서로를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서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서로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롬 14:3).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화와 기쁨을 주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비판하고 예수님을 도전하고 결국은 죽이려는 마음을 품습니다. 이는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사랑과는 거리가 먼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시고 각종 아픈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종된 삶을 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자비를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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