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탐구

구속의 의미

비전의 사람 2019. 8. 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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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7)

 

구속은 영어로 redemption 인데 값을 주고 사다라는 뜻이다. 구속은 빼앗긴 것을 값을 치루고 다시 얻는 것이다. , 값을 치루어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된 병사를 몸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석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는 시장에서 값을 지불하고 노예들을 사는 것이 구속이다.

 

성경에서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죄로부터의 자유하여 구원하는 의미이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의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구속은 구약에서는 대신 값을 치루는 속죄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속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된 구속의 의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구약에서의 구속의 개념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용된 구속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은 거룩히 구별하라고 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3:2). 하나님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에 애굽의 모든 장자의 죽음으로 심판하실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초태생은 하나님께 제물로 희생으로 드려야 했다. 그러나, 사람과 부정한 짐승은 제물로 드려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와 같이 부정한 짐승은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했다.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찌니라.” (13:13). 나귀를 위해서는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했다. 만일 나귀의 첫새끼를 대속하지 않으면, 그 목을 꺾어서 주인의 소유가 되지 못하게 했다.

 

속전(redemption money)은 생명의 값이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장자는 다 대속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를 대속하기 위하여 레위인을 대신하여 취하셨다.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3:41).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셨고, 레위인들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섬길 때에 도와서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셨다. 그리고, 레위인의 숫자보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많아 개인당 은 다섯 세겔을 내어 그 값을 치루게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3:46-47, 51).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가 태어나면 난지 일개월 후에 은 다섯 세겔로 값을 치루어야 했다. 이것을 속전 (redemption money), 즉 구속을 위한 값이었다. “그 사람을 속할 때에는 난지 일개월 이후에 네가 정한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속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18:16).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과 짐승의 첫 태생을 하나님께 값을 치루어야 자기 소유로 삼아야 했다. 왜냐하면, 첫 태생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속전은 생명의 값이다.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21:29-30). 사람이 자신의 소가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단속하지 아니하다가 그 소가 다른 사람을 죽이면 소와 소의 주인은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때 소의 주인은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속죄금을 내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 속죄금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죽임을 당해야 함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으로 속죄금을 내셔서 우리를 살리신 것의 모형이다.

 

기업 무르는 자는 친족 구속자(kindsman redeemer)로서 구속의 의미이다.

 

구속의 다른 예는 토지와 같은 소유물의 구속이다. 사람이 가난하여 자신의 토지를 팔았으면 그의 친족이 그 판 것을 값을 치루고 구속해야 했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5:25).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기업을 구속한다는 의미이다. , 형제의 잃어버린 토지를 대신 값을 치루어 사서 형제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만일 기업을 판 자가 다시 살 힘이 있으면 자신이 값을 치루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을 무를 친족이 없고 자신도 다시 땅을 구속할 힘이 없다면 희년에 그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찌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5:28).

 

룻기는 보아스를 기업 무르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기업을 무르는 자는 기업을 값을 치루고 사다는 구속의 의미이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에 자부인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이때 나오미는 너무나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기에 룻을 추수하는 밭에 보내어 이삭을 주워오게 했다. 룻이 찾아간 곳은 보아스의 밭이었는데 보아스는 룻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 은혜를 베풀었다. 이때 나오미는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자신의 친족으로서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라고 하였다. “...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2:20). 보아스는 룻과의 관계속에서 기업 무를 자로서의 책임을 행하고자 하였다. “...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3:13). 보아스는 자신보다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는지 알아 본 후에 그가 거절하면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마침 기업무를 자의 우선 순위가 있는 친족이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자,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하기로 한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가면서 팔았던 땅을 사서 다시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돌려주었고, 그의 자부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후손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친족 구속자로서 친족이 어려운 상황에서 땅을 팔거나 노예로 팔려간 경우 값을 지불하여 그 땅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몸값을 지불하여 다시 자유하게 하는 친족 의무였다. 보아스는 친족 구속자로서 땅을 사서 다시 회복시켜주었고 룻과 결혼하여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후손을 잇게 한 것은 값을 치루고 다시 회복하는 구속의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redeemer)이시다. 구약에서의 구속은 출애굽에서 보여진다. 하나님은 강한 손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속하셨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6: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사람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의 구원의 대가로 하나님은 어린양의 유월절 희생을 요구하셨다. 구속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자라고 고백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5,26). 구속자는 대가를 지불하고 멍에를 맨 자를 자유하게 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구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희생 제물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멍에 아래 있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9:14)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다.

 

2. 신약에서의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신약에서의 구속은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구속을 위한 값으로 생명을 주셨다. 대속물은 몸값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위하여 성전에 생명의 속전으로 성전세를 드려야 했다(30: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생명의 손전으로 반세게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왜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가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8:34). 죄의 종이기에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죄로 인한 죄인들에게 지옥의 심판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 (3:24).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ransom)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셨다. 디모데전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ransom)으로 드렸다고 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딤전 2:4-6). 속전은 구속의 값으로 치루어야 하는 대가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드리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구속의 값은 자신의 피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값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셨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매여 있었다. 죄의 사망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인 지옥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의미를 감당해야 했다. 나오미와 룻의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에 보아스가 자신을 희생하여 기업을 사서 다시 돌려주고 룻과 결혼하여 기업무를 자 즉 친족 구속자로서의 책임을 다했듯이, 누군가는 인류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우리를 위하여 구속자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이때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드리고 피를 흘리셔서 인류를 위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7) 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로부터 사함을 얻어 자유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다. 구속은 생명의 값을 치루는 것이다. 시장에서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자기의 소유로 하듯이, 하나님은 죄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서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 골로새서는 우리가 구속으로 죄 사함을 받아 어둠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선포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1:13-14).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기 이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3). 율법의 저주라는 의미는 율법의 의는 공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율법에 위배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생명으로 대속해야 했다.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주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은혜를 주셨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4:5-6). 우리가 율법 아래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고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9:12).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셨다. 고린도전서는 우리가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강조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구속은 대가를 지불하여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13).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속자로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1:8).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길이요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3:26) 라고 했다. 로마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8). 구원의 은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은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구속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21:28).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가 보여진다. 진정한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하여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로마서는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가르친다. “...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3). 우리 몸의 구속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로운 몸으로 변화시키는 영화의 구원을 의미한다. 현재의 구원은 예수님이 오셔서 영광의 실체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성령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 구속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재림의 날이다. 구속의 날은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를 보여주셔서 영원한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