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강해(45) -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 15:21-28)

비전의 사람 2019. 12. 28. 19:49

마태복음강해(45) - 가나안 여자의 믿음(15:21-28)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15:22).

 

주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으로 그분의 메시야 되심을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메시야의 권위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입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사라졌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을 떠나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15:21).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해안도시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에 속한 도시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사람, 즉 페니키아 사람들이 거주하며 무역과 자주색 염색기술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던 곳입니다. 에스겔 28장은 두로왕에 대하여 책망하며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요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28:17)고 했습니다. 두로왕이 많은 무역으로 금과 은을 모아 부유하게 되었고 결국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책망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사탄을 두로왕에 비유하며 그의 교만을 책망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자 가나안 여자가 찾아옵니다. 주님을 만난 가나안 여자의 불행했던 삶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불행한 삶에서 은혜의 삶으로 변화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조망하고자 합니다.

 

1.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인식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15:22).

 

가나안 여자가 주님께 찾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15:22) 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7:26)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헬라의 문화권에 자라 헬라어를 하였고 수로보니게 족속, 즉 시리아 지경의 페니키아 족속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에 대한 언급은 노아의 손자로 시작합니다. 함이 죄를 범할 때에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9:24-25). 가나안은 함의 아들로서 노아의 저주를 받습니다. 가나안은 시돈과 헷을 낳고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 등을 낳은 후에 시돈에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지경에 거하게 됩니다(10:15-19). 가나안의 후손은 죄가 관영한 족속이었고 대표적으로 가나안의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600 년이 지난 후에 가나안 땅의 죄가 관영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주시고 가나안 민족을 멸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은 역사적으로 서로를 향하여 적대적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살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악한 왕인 아합의 아내가 시돈 사람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로서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열상 16:31). 시돈은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으로 섬기는 도시국가였습니다. 이와같이 시돈과 두로는 이방 나라의 땅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성했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으로 어두운 도시였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영적으로 어두운 땅에서 빛 되신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쉼을 얻고자 하셨지만, 주님이 그 곳에 가신 내면적인 이유는 고통당하는 가나안 여자를 구원하시고 그 딸을 고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15:22). 가나안 여자는 혈통으로 이방인으로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가나안의 바알 숭배는 자녀를 제물로 드리기도 하고 신전에서 간음을 하는 음란한 의식을 동반했습니다. 그녀의 죄는 자녀에게도 흘러가 그 딸은 우상 숭배와 죄에 깊이 들어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두로와 시돈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여 딸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주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야로 오신 나사렛 예수님 뿐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나사렛의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서 이사야 61장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보았습니다.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도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61:1). 주님은 사탄에게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실 분이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과 딸의 영적인 어두움에 갇혀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비를 구하며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자비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받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2. 가나안 여자는 주님을 철저하게 의지했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15:25).

 

믿음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마음을 비웠을 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아가 마음에 자리잡고 있을 때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님이 메시야로 오신 분임을 믿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이방인이었지만 믿음으로 베들레헴까지 찾아와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이방인이었지만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실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은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어떠한 믿음이었기에 주님은 그녀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을까요?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5:22).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이삭과 야곱, 그리고 유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유다에게서 치리자의 지팡이인 왕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는데, 다윗이 유다 지파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야가 나와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6). 다윗의 나라는 영원히 보존되고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한 것은 메시야가 오셔서 통치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가나안 여자는 메시야가 행하시는 큰 이적을 보고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 주님은 침묵하셨고, 제자들은 소리 지리는 여인을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15:2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역의 우선 순위가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이후에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이방으로 선포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은 주님께 나아와 절하고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15:25).

 

가나안 여자는 주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가나안 여인의 절박함은 귀신들린 딸이 나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을 자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귀신들린 딸은 죄에 매여 살아가는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이 귀신에게 매인바 되어 무덤에서 잠을 자거나 쇠사슬에 매여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딸이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여 절망과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죄는 사망과 영원한 심판으로 가는 고통의 근원인 것입니다. 죄의 고통에서 방황하는 영혼의 안식처는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가나안 여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나안 여인과 같이 주님께 나아가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간절한 믿음과 겸손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3. 가나안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8).

 

가나안 여자가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떡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영생의 떡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영생입니다.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떡을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개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들을 더러운 개로 여기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시각에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 굴욕감을 느끼고 주님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에 일곱번 물에 담그라고 하자,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이 상하여 아람의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나라에는 더 깨끗한 강이 흐르는데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소녀의 간청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번 들어가자 나마안 장군의 문둥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을 하십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에게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열상 17:11)고 했습니다. 이때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려던 참이었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음식을 선지자에게로 가져옵니다. 그녀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그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로 아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얻기 전에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합니다. 그의 믿음의 순종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여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 믿음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라는 말씀으로 시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자녀에게 주어진 생명의 떡을 이방인인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가나안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15:27)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들이 먹듯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먹으면 자신의 딸이 나을 수 있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8)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자가 메가 믿음, 즉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은혜의 부스러기만 먹어도 불행한 딸의 삶이 변화됨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보시고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보실 때에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돌감람나무로 비유하고 이방인을 돌감람나무로 비유하며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11:17). 왜 유대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얻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지만, 이스라엘은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0-32).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였기에 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따랐기에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돈과 두로 지경에서 이방인 여인을 구원하시고 기적으로 귀신들린 딸을 고치신 것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흘러가게 될 것에 대한 암시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두로와 시돈을 지나신 후에 갈릴리의 데가볼리 지경으로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7:34). 주님은 데가볼리라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에게도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역하신 곳은 데가볼리로서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열개의 도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데가볼리에서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15:37-38). 주님의 은혜가 가나안 여자에게 임하신 것처럼 데가볼리의 이방인에게도 임하여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자와 귀신 들린 딸은 주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죄의 저주 아래 살아가는 것이며 인생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자는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짐을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을 때에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주님이 죄를 씻어 주시고 질병을 치유하시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주님께 나아오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