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46) -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라(마 16:1-12).

비전의 사람 2020. 2. 15. 17:10

마태복음 강해(46) -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라(16:1-12).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3).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세상이 공존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영적인 세상입니다. 패니 크로스비 여사는 어린 시절 시력을 잃어 장님이 되었지만 장애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곡을 쓰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삶에서 12,000곡의 주옥같은 찬송시를 쓰게 된 것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영적인 세상을 볼 수 없기에 이 세상 사람에게는 영적인 세상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상과 가치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성령과 말씀으로 영적인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소경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게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갖는 성경적인 원리를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참된 메시야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1).

 

영적으로 소경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육신의 지혜로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으로 온 영을 받지 못했기에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42:18)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듣고 밝히 보아라고 외칩니다. 이는 육적인 소경이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에게 향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입니다. 죄는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어둡게 합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며 영적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자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눈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게 함으로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빛을 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기에 빛을 미워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소경의 이유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동하여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게 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볼 수 없다면 이는 영적으로 소경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제사, 그리고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직 영적인 소경으로 있는 것입니다. 눈을 덮고 있는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메시야의 권능과 사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거절했습니다. 믿지 않는 자 들 중에서 당시에 종교적인 지도자로 인정받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공적으로 시험하여 주님의 신뢰를 무너트리려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원래 함께 다니지 않는 그룹이었습니다. 두 그룹은 배경이나 신학에서 완전히 반대였기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는 함께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사, 그리고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헤롯왕의 딸과 결혼을 하며 사회적인 지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자들이었고 구약을 문자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이방인의 영향력을 배격하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빛 되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위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대중 앞에서 공격하는 일에는 마음을 같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지만 구원의 주 되신 예수님을 거절했기에 소경으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15:14).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행하신 주님의 사역에서 메시야되시는 증거를 수도 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오는 표적보이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마음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한 것을 애굽의 바로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이신 구주로 믿어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새생명을 주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말씀이 귀에 들리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인 분별할 수 없느냐.”(16:3).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통하여 그 분의 메시야 되심을 믿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1).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는 미신중의 하나는 마귀는 땅의 기적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이방 지역에서 생선 두마리와 떡 일곱개로 남자만 사천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에 가득남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며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강팎함을 아시고 비유로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2-3). 주님은 사람들이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지만,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 날은 날이 궂겠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에 대해서는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현상에 대해서는 알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손과 땅, 그리고 메시야를 약속하셨고, 그 후에 약 600년이 지나서 모세를 부르셔서 하늘의 별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후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1500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성경에 약속하신 것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할 때에 선지자로 예언되어진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위대한 순간이었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과 같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제자들이 주님을 향하여 “ ...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4:3) 라고 묻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난리의 소문과 전쟁과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전염병(흠정역)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24:7-8). 흠정역 영어 성경에는 기근과 전염병과 지진이 처처에 있을 것임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 주님이 오실 때에는 민족과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 또한 전염병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처처에 지진과 화산폭발, 민족과 나라의 전쟁들, 곳곳에 일어나는 전염병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중국에 큰 인명 피해가 일어나고 있고 세계가 긴장하며 차단에 힘쓰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앞으로 바이러스로 인하여 10억의 인구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또 다른 징조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지난 이 천년가 세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나라를 세운 것은 기적입니다. 또한 세계 단일 정부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세계는 점점 단일 경제와 정치, 종교를 만들어 가는 곳도 마지막 때의 징조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불법이 성행하고 반역하며 권위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말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자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21:34-37). 우리가 깨어 있지 않다면 악한 세대가 우리의 마음을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깨어 있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님을 만나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3. 우리는 복음과 위선의 교훈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16:4).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16:4). 광야에서 믿음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여 범죄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14:2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도 열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불평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도전한 죄악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신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지속적으로 표적을 요구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이미 수많은 이적으로 그 분의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셨기에 더 이상 보여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보이실 표적이 무엇인가요?

 

주님이 보이시는 참된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었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에 들어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온 것은 부활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한 모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를 떠나셔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되심의 증거는 그분의 이적 뿐만 아니라,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는 가장 위대한 표적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인데,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그 분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의 메시지에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건너편으로 이동하실 때에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16:6)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여 주님이 지적하셨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떡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고, 떡 일곱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즉 주님에게는 떡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영적으로 주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육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영적인 교훈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룩은 영향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 누룩을 모두 두고 누룩 없는 떡만을 가지고 가도록 하신 것은 애굽의 영향력에서 철저하게 벗어나게 하시는 의미였습니다. 특히 애굽의 우상 숭배와 죄의 모양을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복음이 아닌 것으로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했습니다. 그 교훈의 본질은 위선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은 조상들의 교훈이나 외식주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어두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는 영적인 소경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믿음의 성도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