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54) - 왜 용서해야 하는가?(마 18:21-35).

비전의 사람 2020. 7. 4. 21:18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주님은 교회가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18:21)라고 질문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회개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어찌보면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세번이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기에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유대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18:22)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는 용서의 한계는 마흔아홉번까지라도 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뜻은 용서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버드 의대의 한 연구 논문(Harvard Health Publishing)은 일상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습관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향상시킨다고 했습니다. 용서를 하면 용서를 받는 자보다 더 큰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할 때에 나타나는 유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연구에 의하면 누군가에게 원한을 갖는 것은 스트레스가 많은 사건을 경험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근육이 간장되고 혈압이 올라가며, 땀이 많아집니다. 둘째는 건강이 좋아집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혈압과 심장 박동에 관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셋째는 관계가 좋아집니다. 배우자를 용서하는 아내와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는 육체의 통증이 줄어듭니다. 등이 자주 아픈 사람들은 분노를 긍휼의 마음으로 바꾸는 묵상을 한 결과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보다 통증이 덜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섯째 행복이 더해집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심리 치료를 할 때에 용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보다 치료 효과가 훨씬 커졌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일상의 삶에서 용서하는 삶은 마음과 육체에 큰 유익을 끼칩니다. 그리고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도 큰 유익을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용서의 이유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18:23-24).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왕에게 빚진 한 종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왕이 회계를 하다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데러오게 합니다. 왕에게 빚진 종은 왕을 섬기는 고위직에 있는 관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세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왕에게 주어야 할 세금을 착복하여 왕에게 큰 빚을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일만 달란트는 육십억이나 백만 데나리온의 액수라고 합니다. 이는 노동자가 삼천만이나 일억일의 노동자가 일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또는 헬라어로 표기할 수 있는 최고의 단위가 일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약 600 달란트 정도였으니, 일만 달란트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600 달러인데, 그 종이 왕에게 빚진 것은 일만 달란트 였습니다.

 

왕은 그 사람이 이러한 금액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고 그와 그의 가족을 팔게 합니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18:25). 당시에 가장 갚진 노예는 한 달란트 정도였고 보통은 이십분의 일에서 오분의 일 달란트에 팔렸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그와 가족을 노예로 판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직 이십 오만년의 노동을 해야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자신이 다 갚을 것이므로 참아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빚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18:26-27). 종의 주인은 갚아야 할 빚을 생각하면 그를 노예로 팔아 마음의 분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종의 형편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깊은 연민을 느끼며 긍휼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와 자녀들이 노예로 팔려가 서로 평생 헤어져 살아야 하고 그의 소유도 모도 잃을 것을 생각할 때에 너무나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탕감하다용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왕은 종의 빚을 용서하여 빚으로부터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빚은 사람을 매이게 합니다. 빚진 자는 채주에게 매인바 되어 자유를 잃게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빚진 자는 갚을 것이 없다면 자신의 몸이나 가족을 팔아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는 무제한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빚진 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빚진 자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져서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빚진 자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종된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왕이 긍휼히 여기셔서 그 빚을 탕감하여 준 것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값을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7장에서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둘 다 탕감받은 비유를 통하여 죄가 사함 받은 여인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4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빚을 탕감받은 것을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하여 형벌 아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죄의 무거운 값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몸값을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1:14).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의 값을 지옥불에서 영원토록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희생 제물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화해하시고 자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라도 재물을 가지고 자신의 죄 값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죄값을 치룰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용서받은 자는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시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18:22).

 

주님이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에 서로 용서해야 하는 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무제한으로 용서하여 서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연합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은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종은 탕감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왕이 자신의 빚을 탕감하지 않았다면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그와 그의 가족은 평생 노예로 고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 종은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18:28). 그는 왕 앞에서는 엎드려 절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진 동료를 만나서는 그의 목을 누릅니다. 잡다는 헬라어 원어로는 목을 조이다(choked)라는 뜻입니다. 목을 잡아 숨을 못쉬게 압박하며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과격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백일간 일해서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동일하게 요구했던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18:29)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참아주면 갚아준다는 말을 거절합니다. 그에게는 조금의 긍휼의 마음조차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동관을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18:30).

 

그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그가 25만년이나 일해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고 당시 이스라엘에서 걷히는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서는 과격하게 대하며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도리어 빚을 갚도록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는 왕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빚진 자에를 용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완고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고 민망히 여길 정도로 악한 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는 자신이 받은 위대한 사랑과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은혜는 잊고 자신에게 빚진 자를 향해서는 원한과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종이 자신에게 빚진 자를 옥에 가둔 것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모욕을 주거나, 심지어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지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며 예배하는 삶을 시작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육신의 본성이 드러나며 허물과 죄들로 인하여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합니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들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지체들이 아니지만 가정에서의 배우자나 부모님의 잘못된 모습에 큰 상처를 받고 마음에 깊은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준 사람을 보면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종이 나가서 자신에게 빚진 자를 보고 목을 조르고 감옥에 가둔 것은, 그를 향한 원망과 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가 빚을 탕감받은 것에 자유를 누렸지만 마음에는 깊은 감동이 없었고, 도리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자를 찾아가 원망과 분노로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지요? 순간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만났을 때에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 그리고 고통을 준 사람으로 인하여 원망과 분노가 일어나는지요?

 

용서는 용서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은혜의 마음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게 어떠한 상처와 손해를 끼치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다른 지체의 허물과 상처, 그리고 죄에 대하여 용서하는 은혜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용서하는 자가 용서를 받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용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영적인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용서를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종이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자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왕에게 그 일을 다 고합니다.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18:31). 종이 민망한 것은 종이 슬퍼하며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왕이 종을 불러서 그를 악하다고 하며 책망합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18:33-34). 주인은 그를 용서하여 주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둔 것에 대하여 악하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어 죄를 용서받았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왕은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사람, 특히 지체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1958425일 금요일 밤 9시경 펜실베이니아대학 주변 해밀턴 거리 36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 유학생 오인호 씨(당시 26)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기 위해 집 앞에 있는 우체통으로 다가가는 순간 근처에 숨어 있던 11명의 흑인 불량배들이 오 씨를 에워싸고 주먹과 발로 차고 흉기를 찔러 현장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는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범인들은 근처 교회에서 열리는 청소년 댄싱 파티 입장료 35센트를 마련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이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제히 머리기사로 다뤘습니다. 시민들은 35센트 때문에 사람을 죽인 범인들의 비인간성에 경악했고, 폭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의 잔혹함에 분노했습니다. 신문마다 “cold-blooded”(냉혈한), “brutal”(잔혹한), “heartless”(무자비한) 등의 수식어를 써가며 범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여론도 들끓었습니다. 범인들이 비록 청소년들이지만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습니다. 검찰도 중벌을 내리기로 유명한 검사를 배정했습니다. 당시 재판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배심원들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시민들은 오 씨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고 오 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필라델피아 시장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 시장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오 씨의 아버지가 한국에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아들을 죽인 범인들에게 최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려줄 것과, 이들을 위해 가족들이 모금한 돈 500불을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승화시켜 기독교적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인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고, 큰 충격과 비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들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과 인간성 마비에 대해서도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인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족은 가족회의를 열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관대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청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희생자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교육적 빈곤이 살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이들이 석방된 뒤에 직업 교육 및 사회 적응의 목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기금을 적립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죽임을 당한 이와 죽인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며 우리를 기독교적 사랑과 친교 안에 연결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우리의 소망을 밝혔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미국 국민들과 특히 우리의 피붙이인 아들을 죽게 한 이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기병(오인호 씨 아버지) 올림.

 

사망한 오인호씨의 아버지의 편지로 미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들썩였다. 당시 언론들은 아들을 죽인 원수를 향해 용서와 자비의 손을 내미는 오 씨의 부모를 주목했습니다. 52일자 <The Evening Bulletin> 신문에는 “To Return Good for Evil”(악을 선으로 갚다), “In Ho Oh's Parents to Give $500 to Help His Slayers”(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위해 500불 기부한 오 씨의 부모님)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실렸다. 뉴욕 <가이드포스트>4면에 걸쳐 오 씨와 그의 가족에 대한 기사를 담았습니다.

 

오 씨의 죽음 이후 필라델피아 시에서는 오인호 기념 장학금을 마련해 장학금을 모금했고, 그 장학금으로 두 명의 한국 학생이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입학해서 박사 학위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들도 160만 불이 넘는 기금을 모금해 숭실대학교에 전달하고, 일부는 적십자사에 사회복지기금으로 기부했습니다. 1962년에는 미국의 교회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An Epistle from Koreans’(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영화를 만들어 5,000곳이 넘는 미국 교회들에서 상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범인 중 한 명은 훗날 오 씨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보내어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이는 한 성도가 아들을 폭행해 죽인 미국인을 용서하고 은혜를 나눔으로 인하여 그 사랑의 감동이 여러 모양으로 흘러넘쳐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왕은 용서하지 않은 종에 대하여 분노하여 그가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18:34). 종은 자신이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시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교훈을 주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게 되고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마음에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으로 용납하고 교제로 하나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