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4) - 복음의 위대한 능력(롬 1:16-17).

비전의 사람 2020. 6. 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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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4) - 복음의 위대한 능력(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로마서 116-17절의 말씀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유는 헬라인이나 이방인에게 복음에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요? ‘부끄러움이란 확신했던 자신의 신념이 거짓으로 드러나거나 죄로 인한 죄책감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어두움에서 쾌락을 즐기거나 도박을 하다가 언론에 노출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숨기려 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의지했던 신념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한 죄를 책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숭배하면 더 풍성해 질것이라고 했지만, 바알이 오히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삼켰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의 어렸을 대로부터 우리 열조의 산업인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3:24-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바알 숭배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부끄러운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수치와 심판을 가져왔기에 부끄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산위에서 바알 숭배한 것은 첨으로 헛것이라고 책망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다고 선포합니다. “ ...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3:23).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10;11)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결국 수치를 당하여 멸망합니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복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기쁨의 소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복음으로 구원받아 변화된 침례교인이었습니다. 존 번연은 1628년 영국의 엘스토우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서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짖궂은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남의 집 정원에서 과일을 훔쳐 먹거나, 들판의 독사를 막대기로 기절시킨 후에 입을 벌려 혀를 뽑아내는 위험한 장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존 번연은 욕을 잘하여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자, 동네의 주부들이 자녀들을 존 번연과 같이 놀지 않도록 경계했습니다.

 

존 번연의 삶은 경건한 아내와 결혼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남편에게 보통 사람 천국가는 길, 경건의 실천이라는 두 권의 책을 줍니다. 존 번연은 책을 읽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릴 때는 경건하게 살자고 결단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오락에 빠지는 삶을 반복하며 마음의 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존 번연은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너는 죄를 버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느냐? 아니면 죄를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느냐?” 존 번연은 오락을 즐기다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삶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존 번연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고뇌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다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그의 아들의 십자가 피로써 화평을 이룩하셨다.”(1:20)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다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고 진실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로 존 번연은 사역자로 헌신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감옥에 12년간 갇혀 있다가 천로역정을 기록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에 사탄은 복음의 메시지를 변개하여 능력을 잃어버리게 시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에 대하여 책망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1:7).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으며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에 대하여 경고한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였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당하며 화목하게 하는 복음의 사도로서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가 되심을 소개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에 도달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를 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인 율법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이 핵심이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완전하고 의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기준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죄악된 존재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3:10, 13-15). 사람의 존재는 악하기 때문에 혀로는 속이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 존재입니다.

 

최근의 미국의 조지 프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한 시위가 약탈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군중들이 몰려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상점들을 약탈합니다. 경찰이 흑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사건을 그 자체로 끔찍하며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항의하며 시위하는 모습에서 평화로운 시위가 아니라, 약탈과 방화를 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죄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선한 사람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여성들을 학대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는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뿐이 아니라,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의 폭동은 인간의 죄성이 마음에 뿌리내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4:14)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뿌리내린 악을 씻기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사람은 철저하게 실패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인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율법이 아닌 다른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1-22). 복음이 기쁜 소식 이유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는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을 통하여 얻는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육체가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입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의 엡워드의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의 열 다섯번재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은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22세에 토마스 아 켐피아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고 큰 도전을 받습니다. 그 책을 통하여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로의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등을 읽으며 거룩한 삶에 대한 목표를 갖게 됩니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홀리클럽을 만들어 경건한 삶의 열저을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매일 저녁 6시에서 9시 까지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토의하며, 함께 기도와 금식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며 전도하는 일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규칙적인 삶은 나중에 Methodist 라는 감리교라는 별명을 얻게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후에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그는 선교사로 가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나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평안을 누리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조지아에서 모라비아 교도의 목사가 웨슬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속에 성려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대 웨슬리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웨슬리에게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나요?” 이러한 질문에 웨슬리는 안다고 했지만 마음으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의 선교 사역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감을 갖고 귀국하게 됩니다. 영국으로 귀국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를 만나 교제하면서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1738년 저녁에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들이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일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설명하자, 이때 존 웨슬리는 마음으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일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라고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믿기 전까지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지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율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인도하는 안내서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속죄제를 드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과 화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화목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한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율법을 지키셔서 완전한 의로움으로 사셨습니다.

 

3.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로마서의 핵심 진리는 의신칭의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로서 자신을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의의 전가(imput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3).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16:21-22). 아론이 염소의 머리에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며 안수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염소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죄와 불의를 지고 광야로 갑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염소에게 전가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 그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9)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전가(imputation)라는 것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을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나는 죄인들을 벌하시는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분이 가득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죄로 인한 영혼의 큰 번민에 빠지다가 친한 친구가 죽자 주신도 한번은 죽고 예수님이 자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에 Q?졌습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다 갑자기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들어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고해 성사를 하고 경건의 훈련에 열중했지만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톨릭의 주교가 된 이후에 로마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로마의 성요한 라테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거룩한 층계라는 이름을 가진 스칼라 상타가 있었습니다. 이 돌층계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저에서 밟으셨던 계단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순례자들이 이 돌층계를 무플으로 올라가며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자는 연옥에서 받을 형벌이 면제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다른 사람처럼 경건한 계단을 오르는 의식을 거행하다 로마서의 본문이 갑자기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는 죄의 두려움에 살다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주셔서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비로소 이 사실을 알자 하늘의 문들이 열리고 이제는 낙원의 진정한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 비로서 종교 개혁을 통해서 참된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함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함은 믿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의 구원을 얻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인하여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믿음의 삶이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가장 위대한 선언이 로마서 116-17절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자신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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