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7) - 종교의 한계(롬 2:17-29)

비전의 사람 2020. 7. 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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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23).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32절은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남을 설명합니다. 로마서 21절에서 16절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하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고 했습니다. 아무리 도적적인 사람이라도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의 죄를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곳에 숨겨진 마음의 죄까지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7절에서 29절에서는 유대인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종교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율법적인 열심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2:17-18).

 

유대인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요? 유대인들은 원래 유다 지파가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에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유다 지파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다 지파가 살았던 곳에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처가 되어 남 유다와 다른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 함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의 종교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들의 특별한 영적 유산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4-5)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이 양자 삼으신 자녀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룩한 나라로 삼으신 나라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축복은 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영적인 특권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가 이방인들과 구별하게 했지만, 그 구별됨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영적인 자부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2:17-18). 그들은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언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그 율법을 의지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정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율법의 선한 것을 좋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권을 가진 그들은 스스로 상당한 영적 우월감을 가지며 살게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 자부심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교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19-20). 그들은 율법의 지식과 진리를 가진 자로서 영적인 소경을 인도하는 자며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와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며, 회칠한 무덤과 같이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책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우월주의는 종교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가졌던 종교적이고 외적인 우월의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율법과 할례를 의지하는 유대인들이 회개하도록 자신의 과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3:4-6). 사도 바울은 자신은 육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족속이며 사울 왕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외적인 율법과 할례로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의라고 했습니다.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9).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신분이나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선언했습니다.

 

율법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으로 내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향하여 그들의 숨겨진 죄를 지적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21-23). 유대인은 자칭 소경을 인도하며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8계명인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도적질하고 있었고,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간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계명은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성전에 있는 물건을 훔치며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범하는 도적질은 남의 집에 들어가 훔치는 강도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도적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물질 등을 드리지 않았다면 도적질 하는 것이고, 그들이 일하는 시간에 게으름을 피웠다면 도적질 하는 것이며, 일꾼들에게 마땅한 품삯을 주지 않았다면 그것도 또한 도적질인 것입니다. 간음도 다른 여인과 음란한 관계를 맺는 육체적인 간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간음했다고 하면 펄쩍 뛰면서 자신을 모함한다고 역정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간음치 마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죄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는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있는 간음의 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어두운 곳에서 실제 간음의 죄를 범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고 있었습니다.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은 이방 신전의 물건을 훔쳐서 파는 것일 수도 있고, 이방 군인들이 노략한 신전의 물건들을 소장품으로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그들은 우상과 관련된 것을 도적질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24)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그들을 의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외적인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대인이 의지하는 율법과 언약,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을 의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속에 감추인 죄를 드러나게 함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으로 드러난 죄로 인하여 그들 조차도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2. 할례와 같은 외적인 표지는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2:25).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7:10-11). 유대인들은 태어난지 팔일 만에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증거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은 게헨나, 즉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다면 할례가 무익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2:25).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유대인들이라도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할례는 무할례가 되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과 같이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그 무할례라도 참된 할례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2:26). 율법을 행하거나 율법의 제도를 지키는 것은 율법의 한 계명이라도 어기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즉 율법을 지키려는 자가 하나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무할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이라도 율법을 지키면 그 무할례는 할례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도 어느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라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무할례자는 이방인들을 지칭합니다. 이방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도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2:27). 유대인들은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심판대에서 심판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심판대에 앉은 의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문이란 헬라어로 그램마(gramma)로서 씌여진, 기록된이라는 뜻으로 율법을 지칭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있지만 율법을 범함으로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됨을 의미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과 할례로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삶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에 유대인들이 의지하는 할례와 율법은 그들이 맞이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구원받은 자의 공적인 고백입니다. 침례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영생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만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입는 유일한 길입니다.

 

3. 마음의 할례는 말씀과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

 

하나님이 보시며 칭찬하는 사람은 육체에 할례를 한 외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가짐으로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들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란 외적으로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유다의 이름은 칭찬 또는 찬송입니다. 야곱이 유언을 하면서 유다에게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49:8)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찬송 또는 칭찬을 받을 자는 유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칭찬이 유다의 후손인 유대인에게 있을 것인데, 참된 유대인들은 육체에 행한 자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변론하실 때에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자유케 된다고 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기에 진리가 그들을 죄의 종 됨에서 자유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8:44). 그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마귀의 자녀가 되어 죄의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3:6-7).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3: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유대인은 육체에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키려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 표면적 유대인이라 함은 육체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참된 할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유대인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입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는 참된 유대인이 되는 것은 의문인 율법에 있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유대인이 되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령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를 남기는 것인데, 이는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마음의 할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0:16)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며 “...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4:4)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이유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마음의 할례가 성령의 사역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36:26-27). 하나님께서는 새 영인 성령을 부어 주셔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믿는 자에게 보내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의 할례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성령이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은 고귀한 도덕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같이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 앞에 실패하게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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