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56) - 세상보다 영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라(마 19:16-30).

비전의 사람 2020. 7. 18.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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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56) - 세상보다 영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라(19:16-30).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이나 환경에 반응하게 합니다. 생명이 떠나면 더 이상 호흡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으며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며, 더 끔찍한 것은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기에 땅에서 썩어 흙으로 가거나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목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16:26).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참된 생명은 흙으로 지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에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에게 영생을 주셔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유대 지경에 이르시게 됩니다. 이때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달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물이 많은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인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청년은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한 청년이 유대 지경으로 오신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이 청년은 관원으로서 정치적인 지위를 가진 자였고, 율법의 행위로도 흠이 없을 정도로 의로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족속으로 베냐민의 지파였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집안이 부유한 배경이 있어서 어린 시절에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와서 당시의 유명한 가말리엘 아래서 학문을 배운 뛰어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께 찾아온 청년도 젊은 나이에 이미 관원이 되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며, 재정으로도 부유한 자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는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는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이 부유한 자로서 구제도 힘썼고 율법의 의를 행하려고 노력했기에 주위 사람은 그는 분명히 영생을 얻은 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이 주님께 달려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을 때에 모두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이 청년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된 자가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도 외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경건한 영적 생활과 부와 권세까지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도전하시자, 그는 내가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19:20). 그는 자신의 의에 대하여 자신만만하여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무엇이 이 청년의 마음과 눈을 어둡게 하고 가리우게 했을까요? 이 청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자만감 또는 자기 의였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사망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가지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2-3).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어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으나,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있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부자 청년은 재물을 가지고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며 레위기 1918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행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에는 이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가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신 증거이기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관원으로서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이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진 열정이 자신의 의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종교적인 지위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자신의 의라고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자신의 의를 신뢰하였기에 영적으로 어두운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죄의 권세 아래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은 겉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지만, 속은 시체가 썩는 것 같은 부패와 더러움이 가득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을 향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하여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면 넘어지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6)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2. 청년은 영생의 가치보다 재물의 가치를 더욱 높게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부자 청년은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는 부를 가졌고, 행위로는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사회적인 지위로는 관원으로서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얻어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것을 다 취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자신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생명인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청년은 주님께 나아올 때에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배우고 겸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영생을 얻는 길이 율법의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질문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영생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청년의 믿음을 도전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반어법으로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는 주님께서 생명에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음을 아셨지만, 주님께서는 질문을 통하여 청년이 자신의 허물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을 깨달을 때에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청년이 어떠한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가 지켜야 할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9:18-19). 이는 십계명에서 5계명에서 9계명을 언급하신 것이며 또한 레위기 1918절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죄 아래 있는 사람은 그 계명을 모두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희생 제물의 피로 속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주님께서 이러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했을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청년 앞에 계신 분은 이스라엘의 여러 선생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시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께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답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부족한 부분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죄의 본성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은 행위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온전한 거룩함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하여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고(5:28), 요한일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열린 무덤과 같이 가장 부패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과 행실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가 가득한 청년을 향하여 그의 믿음의 진실성을 보이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19:21).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함이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온전함이라 하나님과 같이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흠이 없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기준에 미치려면, 적어도 자신의 생명은 아니더라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는 희생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시자 그는 근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을 사랑하고 있었고 재물을 의지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을 사랑했기에 제물을 팔수도 없었고 주님을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로 영생을 얻고자 했던 청년이 재물에 집착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에 그 재물을 영생보다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재물을 영생이나 주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자신의 행위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제물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근심하여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았다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떠나 자신의 길을 떠나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 ...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19:23-24).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청 앞에 청년은 영생과 세상의 제물 중에 영생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멸망의 도성으로 간 룻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의를 의지하여 그 의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3. 영생은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영원한 삶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19;26)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청년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고 구제하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자가 구원이 없다면 누가 구원이 있단 말입니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19;2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생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6:40)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이빈다. 참된 영생의 삶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참된 영생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그 분을 따르는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라고 하신 제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대가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얻을 보상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주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입니다.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영생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전에 자신의 의로 영생을 얻으려고 했고, 재물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영생을 누리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의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였듯이, 우리도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생의 삶은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영생의 삶과 제자의 삶은 함께 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