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57) - 은혜로의 부르심(마 20:1-16).

비전의 사람 2020. 8. 1. 16:44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5).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들어가려는 부자 청년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청년의 교만을 간파하시며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자 시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모든 계명을 지킨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 보다 물질을 더욱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도전을 받은 청년은 재물이 많기에 근심하여 떠났습니다.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자, 베드로는 자신들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메시야로 자신을 나타내시면 주님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제자들의 기대는 주님이 메시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때에 상급을 얻는 것입니다. 이대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새롭게 될 때에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위하여 모든 소유를 버린 자는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주님의 제자들은 상급에 관심이있었고, 주님은 제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특별한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라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을 향한 메시지와 연관되어 천국에서 누릴 은혜에 대한 교훈입니다.

 

1. 하나님은 그 분의 나라에 일꾼들을 초청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20:1).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품군과 포도원, 그리고 집 주인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극상품 포도를 심은 포도원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포도원을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은 포도원의 열매를 추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때 집주인이 포도원의 일꾼으로 부르는 품군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이 이른 아침에 포도원의 일군을 찾으러 하루 한 데나리온에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그들의 임무는 포도원의 포도를 추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른 아침인 대략 오전 6시부터 일군을 부르고 난 후에, 우리 시각으로 오전 9시인 오후 삼시에도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부릅니다. 나중에는 육시와 구시, 그리고 십일 시에도 일군들을 부릅니다. 십일 시에는 일이 마감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입니다. 그는 일할수 있는 시간이 한시간 뿐임을 알았지만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터에 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품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집 주인이 노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집 주인이 포도원을 위한 품군을 찾는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에 영혼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집 주인은 포도원의 품군을 찾으면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집 주인은 하루종일 놀고 있는 자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긍휼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품군들은 자신들이 놀고 있는 이유가 자신들을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포도원의 주인은 일이 마치는 시간이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품군을 찾아 포도원으로 보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초청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특히 메시야를 거절하는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10:21).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하루종일 손을 벌려 기다리는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주인으로 묘사된 집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부르셔서 구원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하신 분은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방황하는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을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20:3-5).

 

집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을 위해서 일한 품군을 불러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포도원이 아름답게 유지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일군들의 노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포도원이 일하는 사람이 없다면 포도원은 수풀이 우거지고 열매는 그냥 썩어 없어져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에 두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2:15). 아담이 에덴 동산을 다스리는 것은 원어로 보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일을 하면서 지키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담이 죄를 범하자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그 후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섬기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분향하는 향을 피우고, 매주일마다 진성병을 새것으로 바꾸고, 등잔의 불을 항상 밝게 피웠습니다. 그들이 성막에서 시무하는 일이 바로 아담이 에덴에서 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뜰에서 제사장들은 놋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곳에서 힘써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구원만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뜻을 이루고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살아갈 인생을 주신 것은 사명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영적인 제사장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세상과 구별되어 성전에서 제사와 분향으로 하나님을 섬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 말씀으로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기는 것은 거룩한 특권이며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거룩한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청지기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가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서 은사를 주셨기에, 우리는 선한 청지기 같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대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1:23). 사도 바울은 복음의 일군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역에 힘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섬기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꾼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교회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더욱 기도와 말씀에 힘을 내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주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약하게 보느냐.”(20:15).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품군들을 불러 일을 시킨 후에 날씨가 저물게 됩니다. 날씨가 저무는 시간은 오후 6시로 일이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포도원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이니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20:8). 삯을 주는 청지기는 하나님이 심판을 위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즉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을 주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청지기는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에게 품삯을 주는데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십일 시에 온 자는 오후 5시 경에 포도원에 와서 일을 시작한 자로서 하루 품삯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품군에게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자들은 오전 6시 부터 하루 종일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관대한 집주인이 자기들에게는 더 많은 품삯을 주리라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늦게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자 일찍 온 자들이 집 주인을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20:12). 그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신과 오후 늦게 온 일군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억울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3-15). 포도원 주인은 품군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하루 품삯을 받았기에 그 자체로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늦게 온 자들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집 주인이 베푼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더 가는 것에 대하여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에 대하여 왜 악하게 보느냐고 책망을 했습니다.

 

먼저 온 자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을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는 집 주인이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장터에서 하루종일 놀았을 것이고 다음 날에는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부른 집 주인을 위하여 하루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뎠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도 추수기는 8-9월로서 더운 바람과 뜨거운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종일 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 품삯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고 마침내 일을 잘 마쳐서 기쁨으로 집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늦게 온 사람이 먼저 품삯을 받는 것도 불만인데, 자신들과 같은 품삯을 주는 것에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집 주인의 관대한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장터네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포도원의 품군을 부른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들이 품삯을 받고 집으로 가서 자신의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품군들의 원망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의 원망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심판하시고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애굽에서의 원망과 불평하는 모습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미리암과 아론 조차도 모세를 원망하였고, 고라 자손은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시기하여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기뻐하여 아버지가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자 큰 형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원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품군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는 집 주인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에게 관용하고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겸손한 섬기는 자를 먼저 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과 대화하신 후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19:30). 이는 청년이 부자이고 관원이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 했고 구제에도 힘썼던 자로서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 않은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은 나중 된 제자들이 먼저 되고 먼저 된 부자 청년은 나중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포도원의 품군의 비유로 다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먼저 된 자는 종일 포도원에서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품군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 주인을 악한 눈으로 원망했습니다. 집 주인은 늦게 온 품군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준 것에 대하여 선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집 주인의 의도는 긍휼과 선을 베풀기 위하여 그들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 품군은 악하게 바라보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악하다는 것은 악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악한 눈이란 질투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악한 눈과 마음은 인색하고 시기하며, 자기 중심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집주인이 베푼 은혜로 인하여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집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고 자기 의로 자신이 한 일을 생각하며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할 때에 수고와 고난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많은 시간과 물질, 그리고 헌신이 끊임없이 드려지는 것이 사역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의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마음이 부패하여 원망과 불평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로 행하게 되고 다른 지체들에게도 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기는 일꾼이 된 것은 주님이 주신 영광입니다. 우리는 부르신 자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대로 감사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섬기는 자가 먼저 되는 자로 세워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116: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는 처음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섬겼지만 결국 나중 된 자가 됩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는 포도원의 주인이 베푼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는 먼저 되어 하나님께 더욱 존귀한 자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나중 되고 먼저 된 자의 차이는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하여 교만과 자기의가 가득하다면 나중 된 자가 되어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섬긴다면 하나님은 그를 귀히 쓰는 그릇으로 예배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욱 존귀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더욱 존귀하게 쓰임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의 위치에 서서 섬기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