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58) - 제자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마 20:17-28).

비전의 사람 2020. 8. 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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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포도원의 품꾼에 관한 예화를 들려 주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여리고는 평지에 있고 예루살렘은 산위에 있었기에 올라가신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인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조롱당하시며 채찍질의 모진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어려운 순간을 믿음으로 잘 이기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때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주님께 와서 절하며 간구하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매로 추정하며 그 이름은 살로매입니다(27:56, 15:40, 19:25). 즉 예수님께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이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로서 예수님의 이모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구한 높은 자리에 대하여 주님께서 주신 교훈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제자는 부르심의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

 

예수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이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아들을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그들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님은 다른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구한 것은 세상적인 명예와 권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임하시는 나라에서 아들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누리는 영광을 원했던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이심을 믿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주님을 따르면서 기대했던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오셔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23:5).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야가 오셔서 세우실 나라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정치적인 왕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셨지만, 세배대의 아내와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신데 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을 믿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는 온 인류를 위한 구속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셔서 희생양이 되시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가르치시고자 했던 메시지는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온 인류는 어린양이신 메시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됨의 동기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앉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4;19)고 하심으로 제자됨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제자됨의 본질은 주님을 배워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세베대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보다는 자신의 헌신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위치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하고 자신의 직분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한다는 탐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높은 위치가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도록 종의 마음과 섬김인 것입니다.

 

2. 제자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0:22).

 

예수님께서는 진정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0:22). 이때 제자들은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진노의 잔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모든 나라에 내리는 심판에 대하여 진노의 잔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25:15). 진노의 잔은 하나님이 이방 나라에 내리시는 심판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잔을 마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간절히 잔을 옮겨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26:39).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지나기기를 간구하시면서도 결국은 아들인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도록 순복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하셨을까요? 아버지께서는 변화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아들을 한 번도 미워하신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아들이신 독생자에게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셨는가요? 그 이유는 아들의 속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죄의 진노로 영원한 형벌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진노의 잔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내리셔야 할 진노를 아들이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우셨듯이, 이제는 때가 되어 아들이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하여 대신 희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당할 고난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53:1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자신들도 주님과 같이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잔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에 자신들도 주님과 같은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잔을 마시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에게 잡혀가시자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26:56).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재판을 받는 곳 까지 따라갔지만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26:69-75).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수 있다고 고백한 제자이지만 두려움에 빠져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이 주시는 잔을 마실 것이며, 좌우편에 앉는 것인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0:23). 주님의 말씀대로 야고보는 헤롯에 의하여 순교를 당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받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에 동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9).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는 모두 도망했지만,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3. 제자는 주님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6-27).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주님께 영광의 자리를 요구한 것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분노하였습니다. 열 제자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 이유는 그들도 마음에 같은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권력과 하나님의 종들의 섬김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권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0:25). 세상의 집권자들은 지위가 높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통치의 자세는 자신의 힘으로 권세를 과시하거나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헤롯은 자신의 강한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에게 맞서는 자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고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통치하는 나라에 신전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거나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거나 세금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부의 축제의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6-27).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으로 크고자 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제자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종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는 디아코노스로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시중드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섬기는 자는 열심히 봉사하느라 먼지를 일으키는 자라는 의미로 봉사하는 자입니다. 디아코노스라는 섬기는 자는 교회의 집사라는 직분의 어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일꾼으로 표현할 때에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종된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일군이 바로 디아코노스로서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복음의 일군이 되었다고 하면서 교회의 일군이라고 했습니다.(1:23,25).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주님을 섬길 때에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부려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0:27).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입니다. 이는 섬기는 자 보다 더 낮은 신분은 노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종은 자신의 권리를 주인에게 양도하여 철저하게 섬기는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철저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야고보와 요한처럼 최고의 높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가장 높은 first 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의와 권리를 포기하여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 즉, 디아코노스로서 섬기는 자이며, 함께 종된 즉 둘로스 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섬기는 집사와 같고 종과 같이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종이 먼저 되지 않는다면 일군으로 섬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설명하면서 그의 세가지의 모습을 칭찬합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된 종이라.”(4:7). 두기고는 사랑을 받는 형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으면 형제가 됩니다. 그리고 형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와 복음을 섬기는 자가 됩니다. 이는 디아코노스로서 부지런히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의 마음은 종이 되어서 섬길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종의 모습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가르치시면서 인자이신 자신을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아 높은 자리에 앉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속물이란 구약에서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값을 치루는 속전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신 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 값으로 황소와 염소를 희생 제물로 드려 속죄받았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야의 구속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마음을 품어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자 자기를 낮추셔서 종의 형제를 가져시고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7-8).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심으로 우리를 섬기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참된 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종이 되어 섬겨 주셨기에 그 분은 우리의 주가 되셔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같이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들이 탐욕의 마음을 품자 다른 제자들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은 곳에 않거나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고 더 나아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종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섬기는 당시에 가장 낮은 신분인 노예를 지칭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성도의 몸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인정받고 존중 받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머나 낮은 곳에서 종의 모습으로 섬기느냐 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영적인 훈련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사역에서 주님은 높임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과 같이 종의 모습으로 성숙해가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종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