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59) - 제자됨의 동기(마 20:29-34).

비전의 사람 2020. 9. 5. 16: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20:34).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들르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경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한 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음을 기록했습니다(9:51-53).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여 가셨기에 여리고 성을 지나시게 되셨습니다. 여리고는 구약에서부터 잘 알려진 성읍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첫 관문인 여리고를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라합이 여리고 출신이었습니다. 여리고의 물이 쓸 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물 근원에 소금을 뿌려 우물물을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이 화려한 겨울 궁전을 신축하여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여리고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여 요단 계곡이나 요단 동편의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희생되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세번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절기를 지키려는 수 많은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신 후에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만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였고, 주님을 만나 회개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리고를 떠나시면서 소경 둘을 만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소경 둘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후에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제자는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믿는 자입니다.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가복음은 소경중의 한명은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했습니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한 이유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많은 순례자들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구제는 의로운 행동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신명기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0-1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은 거지들에게 후한 마음으로 구제를 했던 것입니다.

 

소경으로서 구걸하던 두 명의 거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20:30). 바디오매와 다른 소경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의 첫 글자를 따서 야훼 라고 불렀고, 히브리어로 주(Lord) 라는 뜻의 아도니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주는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유대 사회에서 주라는 뜻은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신상에 분향하며 주라는 고백을 거절하였고, 그 거절의 대가를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였고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으로서 다윗의 위가 영원히 굳건해질 것이라는 예언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나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다윗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에 유다는 구원을 얻으며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통치하실 천년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61장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이신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61:1). 메시야가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눈먼 자들을 뜨게 하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귀신에게 매인 자를 놓아 주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사역은 메시야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우리이 구주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1:13-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만물이 그로 인하여 서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1:15). 예수 그리스도는 온 만물을 창조하신 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게 하는 동기입니다.

 

2. 제자는 예수님의 구원을 은혜로 받은 자입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20:33).

 

소경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힘껏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주님을 보기를 간구했던 그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힘껏 외쳤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거지 소경들을 책망하며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힘써 소리를 지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관심을 끄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20:33)라고 답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인 권력을 얻고자 한다면 헤롯에게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왕은 로마의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선물을 주고 충성을 맹세한 후에 유다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유대의 학문을 배우고자 했다면 할렐 학파나 샴마이 학파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어가 바리새인이 되는 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재물을 얻고자 했다면 당시의 탁월한 사업가를 찾아가 직원이 되서라도 경영을 배우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에 은이나 금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시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소경이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볼 수만 있다면 거지가 되어 구걸할 필요도 없고 조롱당하지 않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부르며 자신들의 눈을 떠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필요를 보시고 눈을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20:34). 눈을 뜨게 됨으로 소경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소경을 낫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은 두 가지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능력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십니다. 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주님께 자비를 구함으로 주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소경이 된 이유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리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는 소경된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경된 자는 눈을 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두 소경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알았기에 주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듯이, 자신의 영적인 비참함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두 소경은 육적이 소경이 나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은 바디메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음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10:52). 소경되었던 자는 주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만나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육신의 눈을 고친 것 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3. 제자는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20:34).

 

소경된 자는 눈을 고침을 받은 후에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어두움에 갇혀 보지 못하는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자신들을 고쳐 주셔서 눈이 뜨자 처음으로 본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자가 예수님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고쳐주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의 조건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소경된 자는 거지였기에 자신들이 내려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일어나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린이의 때에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를 부인하거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일학교에서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을 주로 고백하며 평생을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주님을 따른다면 자기를 부인할 것이 너무나 많기에 주님을 영접하지만 따르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크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난 후에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을 따를 것이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 의미를 알고 마음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음을 더욱 확증하며 평생을 주님이 주신 지상 사명을 위하여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1820년에 태어난 후 며칠이 지난 후에 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안과 진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 그 마을에 한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 오히려 크로스비의 눈을 멀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 후 크로스비는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신앙 교육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그 후로 크로스비는 할머니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훈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리고 크로스비는 육체의 눈이 멀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대한 사랑을 보면서 만이천 곡을 지어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간증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눈을 잃게 한 그 가련한 의사는 이내 이웃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그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겠다. 이 의사는 내가 시력을 잃어버린 그 사건 이후 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여러 가지 슬픔을 겪었지만, 그 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내 눈을 멀게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거듭거듭 하고 싶다. 혹시 여러분이 그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을 전해 주길 바란다.

 

나는 왜 그 의사가 엄연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그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지 않을까? 이유는 많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하나는 내가 눈이 먼 것이 의사의 과실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실수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육신의 흑암 속에서 살더라도 이를 통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을 잘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내 시선을 잡아끌었을 온갖 흥밋거리와 아름다운 것들을 쳐다보는 데 마음을 빼앗겼더라면, 나는 수천 곡이나 되는 찬송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크로스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가를 작사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장애를 통하여 큰 일을 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크로스비 패니는 보지 못하는 것에 눈물짓거나 한숨 쉬지 않겠다면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열정적으로 찬송가 작사를 통해 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처한 상황을 볼 때 감사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무엇이 늘 그렇게 감사로 가득 차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패니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분명했습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답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가치의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크로스비가 육체의 장애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통하여 삶의 가치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부가 세상의 최고 가치로 여기다가, 예수님을 만나 가치가 변한 이후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며 물질보다는 주님께 순종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주님을 따랐습니다. 소경들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가치가 변하여 세상이 아닌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안에서 더욱 가치있고 소중한 삶이 되기 위하여 제자의 삶을 살게 하는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고 구원하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