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60) - 겸손한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마 21:1-11).

비전의 사람 2020. 9. 1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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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21:5).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바돌로매와 다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는 약 27km 거리로 보통 사람들의 하루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처에 오신 후에 먼저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2:1). 예수님이 전에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기적으로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찾아오시자,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부터 28장까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유월절 절기를 맞아 십자가에 죽으셔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0:19). 이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육일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벳바게라는 곳에 이르시게 됩니다. 벧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으로, 무화과가 많이 열리는 감람산의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은 온 성이 소동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에 동방 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찾아와 유대인의 왕이 나심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온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이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온 성이 소동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주되신 예수님께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21:3).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하루밤을 지내신 후에 벳바게에 가까이 이르시자 두 제자를 보내시며 나귀와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21:2). 마가복음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끌고 오너라고 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풀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응답합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21:3).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답변하자 그들이 허락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온 후에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예수님이 타시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시면서 누구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로 답변하라고 하시면서, 그리하면 그들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헬라어로 쿠리오스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유대인에게는 주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아도나이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부르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 첫 자를 따서 여호와라고 지칭했고, 그 분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는 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칭했습니다.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것은 온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야 했는가요? 이는 주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95:3-5).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에 그 분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만물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의 생명까지도 그 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 주신 자도 여호와시여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1:21)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되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쓰신다고 하실 때에 나귀의 주인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을 주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주께서 두 제자를 보내셔서 나귀를 데리고 오는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 분을 섬기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 분의 종으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온 세상의 구속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 분의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삶은 성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셔서 우리를 그 분의 그릇으로 쓰임받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금과 같이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과 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21:5).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가 왕으로 오셔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9:9). 스가랴 선지자는 왕이 임하셔서 공의로 다스리시며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왕이신 메시야는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을 나타낼 때는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보이기 위하여 강하고 용맹스러운 말을 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왕은 호화스러운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입성함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로 드러내실 때에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즉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 것은 그 분의 겸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을 타는 것은 전쟁의 의미가 있지만, 나귀를 타는 것은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를 타심으로 자신의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야이시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으시고 항상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시는 모습에서 종의 형체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예수님은 섬기시는 종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권세와 명예를 얻으면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들은 자신을 신성시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의 몸으로 낮은 곳에 오셨고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는 예수님의 겸손을 설명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예수님은 나귀를 타실 만큼 겸손한 왕이셨습니다. 그 분의 겸손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모습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의 겸손은 지식이나 사고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겸손을 배우는 길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는 자신을 끊임없이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종의 길은 자신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겸손은 자신의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지 않고,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에 타신 예수 그리스도같이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21:9).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앉자 예수님이 그 위에 타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겉옷을 길에 펴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벤 나무 가지는 종려 나무라고 했습니다(12:13).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펴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피며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야를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순례의 길을 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본 자들이었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는 갈릴리 바다를 걷기도 하시고 잔잔케 하신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로 오는 길에는 소경 두 사람을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나귀를 타신 주님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힘껏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21:9).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내려오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하나님을 크게 찬양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왕으로 오신 메시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19:38).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신 메시야를 찬송하며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청하자, 주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잠잠하년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로서 입성하실 때에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은 이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평화와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며 세금을 수탈하고 백성들을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근처의 안토니오 요새에는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며 예루살렘을 통치하며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가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 반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를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희롱하였으며, 얼굴에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라고 조롱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오신 예수가 자칭 주라고 하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자, 그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로마군인들이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21:9)고 외쳤습니다. 호산나의 뜻은 ,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야가 자신들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외침은 시편 118편의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이 찬송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절기를 지내려고 찾아온 순례자들을 환영하러 나갈 때에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절기의 기간에 성전과 회당에서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시편 118편은 메시야의 구원을 찬송합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 가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118:19-26). 호산나는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의의 문은 여호와의 문으로 성전의 문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의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성전의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모습은 그 분이 왕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우리의 왕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보배가 되시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건축자들이 버리는 돌과 같이 됩니다(벧전 2:5-8).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편 118편의 찬양과 같이 메시야를 찬송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4. 우리는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2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소동하며 이는 누군지 묻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습니다.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21:11).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과 대화를 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때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을 향하여 “...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서이다.”(4:19)라고 했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께서 선지자라고 하신 것은 그 분이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선지자라 함은 모세가 약속한 메시야로서의 선지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18:15).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면 그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날이 되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세상의 음성이나 사탄이 주는 음성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였고 그 분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넘기워 죽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3:7-8)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들은 마음을 강팎케 하여 그 분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로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유다 사람들도 자신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사십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황폐화되는 비극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임을 믿고 날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왕으로의 승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며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함으로 그 분이 쓰시는 일에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같이 자신을 낮추어 겸손함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시기에 그 분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지자이시기에 그 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