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때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호산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로 찬송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갈릴리로부터 함께 온 순례객들과 예루살렘성에서 나온 무리들이 함께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11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제자들을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튼날인 월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에서 17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성전의 배경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유월절 기간에는 수많은 순례객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약 20만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그 주위의 마을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순례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벳바게나 베다니와 같은 가까운 마을에 사람들이 여관이나 텐트를 치고 임시로 거주하며 절기를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거하셨습니다. 이들은 유월절 기간에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며 죄를 속죄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고자 했던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 앞에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역은 공생애 기간 중에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즈음에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2:13-16).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영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회복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결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1.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하늘의 성전으로서 천사들의 찬송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거룩하게 구별된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막에 거하시며 이스라엘과 교제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출 25:8-9). 모세가 지은 성막은 하늘의 성전의 모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히 8:5). 성막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기에 텐트와 같이 조립하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거하시며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룩한 곳에 거하셔서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성막의 의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희생 제사를 통하여 인간과 교제하시는 구별된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셔서 복을 주시고 계속적인 교제를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였기에 가장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성막은 휘장으로 바깥과 구분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레위인이 성막을 지켜야 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에는 희생 제물을 잡고 제사를 드리는 성막 뜰이 있었고,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가장 거룩한 곳으로서 대제사장이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일년에 한번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거룩했기에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들만이 성소에 들어가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 뜰에서 희생 제사를 돕거나 관리하는 일을 돕는 역할만 할 수 있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성소에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거룩해야 했고, 하나님께 가져오는 제물도 흠이 없는 구별된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도 흠이 없는 자가 하나님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리거나 성소에서 분향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에서의 제사장들과 제물들이 흠이 없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은 이 땅에 성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성전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그 성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요 2:19). 예수님께서는 사십 륙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2:21). 성전의 거룩한 기명인 번제단, 물두멍, 분향단, 진성별상, 금촛대, 언약궤와 속죄소 등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사역과 생명의 말씀, 그리고 중보자 되시고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성전이었듯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아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쫗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마 21:1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았지만, 그들이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내 집이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성전을 내 집이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사야에서 증거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들이 와서 기도하며 예배하는 곳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기도하는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어 타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굴혈이란 말을 예레미야 7장 11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7:11).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적질과 살인, 간음과 거짓 맹세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알에게 분향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유다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며 거짓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는 우상 숭배와 불의의 가증한 일을 행하고는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는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가 없이 하나님께 나가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성전에 가셔서 강도의 굴혈로 만드셨다고 하신 배경은 무엇인가요?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여 46년 동안 지어졌습니다(요 2:20). 그리고 헤롯 성전은 A.D. 64년 까지 건축되어 완공되었지만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무너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장사하는 모습을 이해하려면 성전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바깥 뜰은 이방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이방인의 뜰(Gentile's Court)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지나면 여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성전에 들어가는 이방인은 죽임을 당한다.”는 표지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으로 이어지는 여인의 뜰에 들어가면 죽음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로 인하여 성전이 더럽혀 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뜰을 지나면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그곳에서 희생 제물을 도축하여 번제단에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는 순례객들이 성전세를 내고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환전상과 희생 제물을 매매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한달 전부터 유대인들은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 들은 한달 전부터 다리와 도로를 보수하고, 순례자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들은 하얗게 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절기를 통하여 양과 소의 십일조를 드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절기 기간에 자신을 부정에서 정결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전의 입구인 이방인의 뜰에는 환전상들이 화폐를 갈릴리 세겔로 환전하는 일과 매매상들이 희생 제물을 매매하는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두로, 애굽과 그리스, 로마의 화폐가 통용되었기에,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성전세인 반 세겔을 갈릴리 세겔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때 환전상들은 환전하는 대가로 상당한 금액의 환율 이자를 착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기간에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기에 순례자들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파는 희생 제물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순례객들이 해외나 갈릴리와 같은 먼 지방에서 희생 제물을 데리고 온다면 오는 과정에서 질병을 얻거나 상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짐승은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없었기에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의 상태를 검사하여 흠이 있는 희생 제물은 거절했습니다. 특히 성전 입구에서 희생 제물의 자격을 엄격하게 검사하는 사람들은 희생 제물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환전상들은 유월절 명절 기간에 높은 이자를 받아 성전세를 내는 갈릴리 세겔로 환전해 주었고, 매매하는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희생 제물을 몇 배로 높은 금액으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결국 성전의 시장에서 파는 희생 제물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판매하는 희생 제물은 제사장들이 흠없는 짐승으로 간주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절기인 유월절 기간에 막대한 부를 얻는 기회로 삼아 순례객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안나스를 ‘막대한 부를 축척한 자’로 탐욕과 부패한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탐욕을 채우는 환전상과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안나스 가문이 성전을 더럽히는 일에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과 소를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돈을 쏟고, 그들의 상을 뒤엎으실 때에 어느 누구도 한마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그들을 두렵게 하고 예수님의 책망은 그들의 양심을 깨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을 정결하게 하시는 메시야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탐욕과 성전의 부정함을 책망하시는 모습에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주님은 메시야의 권능으로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셨기에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아이들은 예수님의 성전을 향한 열정과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권능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외침으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환전상들과 매매하는 자들을 책망하신 일과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찬송을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찬양을 온전케 하셨다는 말씀으로 아이들의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6). 예수님께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시며 어른들이 잠잠할 때에 어린 아기들로 인하여도 찬송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메시야로서 우리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구약 시대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믿는 자에게 보내주심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일천명의 여사제들이 창녀가 되어 음란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고린도는 음란의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는 자신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우리의 영과 혼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몸은 세상에서 음란과 방탕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에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우리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몸을 가지고 음란한 창녀의 지체로 만드느냐고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은 자는 과거에는 죄의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아담 안에 살아가 자신을 부정과 불법에 드려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면 그 일을 부끄러워할 만큼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갈 때에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도록 자신을 죄와 부정한 것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죄악된 것에서 나와 분리하여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성전의 거룩함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의 연합을 이루는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믿는 자가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전이기에, 믿는 자가 성령으로 연합된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이는 구약적인 성전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섬기는 건물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신약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셔서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세워질 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의미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교회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할 때에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연합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고린도전서 6장은 예수님의 피로 사신 개인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3장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세상과 구별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는 집합적인 의미로 교회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시는 영적 장소로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듯이, 교회가 영적으로 거룩해야 하며 질서와 관계에서도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교회를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럽히다’라는 뜻은 ‘타락시키다 부패시키다, 파괴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복음이 아닌 거짓 교리가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교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여 복음의 순수성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이 있고, 어떤 교회들은 동성애를 수용해서 안수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믿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카톨릭이 면제부를 팔아 구원을 주는 행위가 교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의 관계에서도 영적인 순결과 관계의 거룩을 지켜감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마음과 영을 정결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나님께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셔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기를 원했던 다윗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개인과 교회가 거룩을 회복하여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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