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64) -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십니다(마 21:33-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하신 후에 다시 포도원의 비유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한 집의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은 울타리를 만들어 포도원의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 주인은 포도를 결실한 후에 즙을 짜는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즙을 짜는 구유란 영어로 winepress로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포도주 틀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포도를 결실한 후에 바위를 파 포도를 놓아두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올라가서 포도를 발로 으깨면 흘러나온 포도즙이 홈을 통해서 밑의 바위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포도주를 항아리나 가죽부대에 담아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망대를 지었습니다. 망대의 역할은 도둑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거나, 굳은 날씨에 피할 수 있게 하며, 포도원에 필요한 장비 등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집 주인은 포도원을 잘 만든 후에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추수 때가 가깝게 되자 집 주인은 농사에 대한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농부들이 포도원의 주인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농부는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치며 함부로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내어 그들이 바른 자세를 갖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집 주인이 보낸 종들을 다시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며 저들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내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집 주인이 보낸 아들을 보고 말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마 21:38). 그리고 농부들이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으로 데리고 가서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의 농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마 21:40).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마 21:41).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포도원의 주인의 종들을 멸시하고 그 아들까지 죽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은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주는 것이 맞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비유로 하신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다시 확신하기를 기대합니다.
1.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십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자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마 21:33).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로 두르고, 포도즙을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비유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거민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신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즙을 짜는 틀을 팠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들 포도를 맺고 말았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포도원의 주인으로 비유하셨고, 포도원을 이스라엘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를 받은 농부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를 지칭하신 것입니다. 농부는 주인의 포도원을 잘 관리하여 소출을 얻은 다음, 그 정한 부분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즉 농부는 포도원을 관리하고 그 수입을 주인에게 주어야 하는 청지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농부는 탐심을 품기 시작하면서 그 포도원을 마치 자신의 소유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기 때문입니다.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마 21:35). 포도원 주인이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어 과실을 요구한 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구약 시대의 악한 왕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선대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거나 죽이고 돌로 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역대하는 요아스 시대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하여 책망했습니다. “그 열조가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역하 24:18).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요시야 왕이 성전 뜰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덩이에 던져지고 돌에 맞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애 3:53)라고 했습니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방백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돌을 던져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므낫세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나무에 가두고 톱으로 썰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7)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려 한 것은 이방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거짓으로 믿는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수없이 죽였고, 엘리야 선지자도 죽이려고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엘리야 선지자는 도리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헤롯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카톨릭이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침례교인들을 오천만 명 이상이나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 했던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이었고, 물에 잠기는 침례의 교리였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이 자신들이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라고 간주하며 주인이 보낸 종들을 함부로 대하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내었지만 그들은 동일하게 주인의 종들에게 대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농부들에게 다른 종들을 보내는 것은 그의 인내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농부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도록 종들인 선지자들을 보내며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고 했습니다. 농부가 포도원을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잘 관리하도록 왕과 대제사장, 레위인들, 그리고 장로들과 같은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맡기신 주님의 백성을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며 섬겨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 그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섬기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은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교회의 열매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과 성령의 열매가 날 때에 주님이 영광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마 21:37).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내하시며 크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집 주인은 아들을 보내시기로 합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마 21:37).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며 아들은 공경한다는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그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농부들은 섬뜩할 정도로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마 21:38-39). 농부들은 자신들이 포도원을 불법으로 차지하려고 주인의 아들인 상속자를 죽이자고 모의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이유는 주인의 유업을 차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과 농부의 갈등의 이유는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을 일구어 농부에게 맡기고 소출에 대한 세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세운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자신들이 농사를 짓다 보니까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며 그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주인의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이 분쟁의 씨앗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근본적인 뿌리도 삶에 대한 소유권입니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도 자신의 생각과 몸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8-19). 우리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은 삶의 수많은 갈등을 피하고 말씀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주권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하는 삶은 패배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구원받은 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죄가 구약시대에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850년 전인 아합 왕이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아합의 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이 그 포도원에 대한 탐욕을 품고 그 포도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나봇은 조상이 물려준 땅을 왕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합이 근심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세벨이 아합의 이름으로 나봇이 사는 성의 장로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아합은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포도원의 주인인 나봇을 돌로 쳐 죽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포도원을 빼앗은 죄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열상 21:19).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봇이라는 무죄한 자의 피에 대하여 아합을 심판하신 공의의 주이십니다. 하물며 자신의 아들을 죽인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어떠할지 생각해 봅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포도원 주인을 대신해서 왔기에 존경과 순종을 받을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임으로 인하여 반역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죽인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죽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루살렘 밖인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법을 근거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1-12). 구약의 제사에서 속죄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물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를 성소에 뿌리고 난 후에 수송아지의 가죽을 비롯한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로 태웠습니다.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출 29:14). 속죄제를 위하여 희생된 수송아지가 성문 밖에서 태워졌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세상에 오셨지만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죽였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3. 아들을 믿는 자가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됩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마 21:40).
예수님께서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 즉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자신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답합니다.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마 21:41).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의 입에서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라는 답변이 나왔습니다. 즉 자신들의 말로 자신들이 받을 형벌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을 형벌을 스스로 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농부는 바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잘 인도하도록 맡겼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포도원인양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하여 직분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기를 마치시자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마 26:3-4). 그리고 유월절 새벽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박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 27:1-2).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대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주님께서는 시편 118편의 22-2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릿돌이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돌을 가져다가 건물을 세웁니다. 이때 건축자가 자신이 원하는 돌을 가져다가 건물이나 성전을 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주춧돌이 되는 기초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것과 같은 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을 지을 때에 시작하는 기초석입니다. 만일 머릿돌이 잘못 놓여지면 건물 전체가 기울어지거나 붕괴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돌로 비유하는 여러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산 돌(living stone)이십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4-5).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음으로 산 돌 같이 거룩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인 집인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시고, 그분을 통하여 생명을 얻은 자들이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그 분을 믿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연합하여 거룩한 집인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사도 베드로도 주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보배이시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저희로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뜨인 돌입니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다 2:34-35).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통해서 세상에 세워질 제국들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그 나라는 바벨론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마지막 열 왕국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뜨인 돌이 나와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춰서 부숴뜨립니다. 그리고 우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의 신상을 부숴뜨리고 태산을 이룬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다 2:44). 이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겪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서의 영적인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그가 보내신 종들을 거절했으며, 심지어는 그의 아들까지 거절하고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세워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셔서 그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는 돌이 떨어져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태산을 이루는 돌이 열방의 제국을 상징하는 신상을 깨트리듯이, 예수 그리스도외의 모든 것은 깨어져 가루와 같이 흩어질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복된 모퉁이의 모퉁이돌이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 돌이 그들 위에 떨어져 저들을 가루로 만들어 흩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의 메시지가 있듯이,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전이 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세워집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우리는 모퉁이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가 되시며 보배이심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했지만, 도리어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은 스스로 자신들이 악한 농부와 같은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삶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고 따르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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