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강해(63) -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삶의 열매(마 21:23-32).

비전의 사람 2020. 11. 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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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강해(63) -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삶의 열매(21:23-3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

 

최근 미국의 대선을 마쳤지만 부정투표를 주장하며 투표에 불복하는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투표에서 승리를 주장하는 바이든 후보와의 갈등으로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로서 국민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여 4년간 임기를 보장하고, 연임하여 두 차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국민의 투표로 결정된 자입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국가의 통치자로서 외교와 군대, 내치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에 그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 이후에 스가랴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나귀를 타시고 성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음 날에는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분노했지만, 성전에 있던 아이들이 주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심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다음 날 다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의결기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 종교의 권세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주님의 권위에 대하여 묻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를 믿고 따랐지만,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권세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누가 예수님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권세는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합법적인 권한입니다. 그 권한을 가진 자는 힘을 얻게 됩니다.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 권세를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며 거짓입니다. 권세는 모두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주어지는 자격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지상사명을 주시면서 권세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제자삼는 사역을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서기관들은 위대한 랍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신의 가르침에 권위를 두지만, 예수님은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이 곧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권세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거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치시며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9: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의 권세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시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5:22-2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믿는 자들을 심판하셔서 상급을 주실 것이지만, 백보좌 심판대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형벌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지신 이유는 그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창조물을 지으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 되신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1:15-16).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 자체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의 권세를 도전하며 반역하기 시작했습니다.

 

2.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21:24).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21:25)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저희들이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침례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의 질책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셨습니다. 침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강한 메시지를 유대 사회에 만연한 종교 주의를 질책했습니다. 침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3:10)라고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충돌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침례 요한은 이사야가 예언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40:3).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심을 받았기에, 침례 요한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기경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라고 했습니다. 즉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메시야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1:34). 예수님께서는 침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셨기에 그로부터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을 칭찬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고 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였기에 주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자가 없다는 말씀으로 격려를 주셨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침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말씀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틀에 갇혀서 외식주의에 빠져 있었고, 성전이 그들의 배를 불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대제사장을 뽑았고, 사두개인으로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침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침례요한을 선지자로 여겼다면 침례요한이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한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침례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백성들의 질책을 받을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은 그것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로 자신들의 깊은 내면의 위선을 숨기려 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교만이나 위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새리와 같이 부정축제하지 않는 자라고 자부하며, 음란한 매춘부와 같이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죄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무엇이라고 답변하실까요? 주님은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열매를 통해서 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의 열매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믿음이 없는 속빈 강정에 불과합니다. 대제사장은 겉은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을 입었지만, 속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폭로하는 예수님을 도리어 헤치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위선과 진실이 대면했을 때에 대제사장은 기꺼히 진실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대면했을 때에 대제사장들과 같은 위선으로 인하여 주님이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믿음의 열매는 회개와 순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다음의 비유로 책망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자녀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시켰습니다. 이때 큰 아들은 가서 일하겠다고 대답을 한 후에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하고는 회개하고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이때 주님은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녀는 말만 한 자녀가 아니라, 회개하고 행동으로 순종한 둘째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아들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과 거짓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고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며 제사장의 직무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사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면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하며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0-11). 바리새인든 하나님 앞에 자신은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는 의로운 자이며, 하나님께도 십일조를 두리고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며 경건 생활을 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에 불순종하여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포도원에 일하러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했던 세리와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서이다 하였느니라.”(18:13). 세리는 삭개오와 같은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회개가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주님은 의롭게 된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 하나님이 의롭다 하는 자는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째 아들의 순종을 말씀하시며 세리와 창기들이 대제사장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 세리와 창기들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죄인으로 여겼던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전한 말씀을 믿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침례요한이 전한 말씀을 믿는 것은 그가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를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의 길로 들어섰지만, 침례 요한이 전한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믿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모습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새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 앞에서 회개와 순종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된 삶이 우리의 열매이며, 주님을 교회를 통하여 섬기는 삶이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한 새생명이 열매로 나타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귀한 사람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