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69) -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비전의 사람 2020. 12. 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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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69) - 네 이웃을 사랑하라.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9-40).

 

주님께서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신 후에 두 번째 계명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9-40).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큰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계명은 레위기 1918절의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9:18).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하나님이나 다른 신들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다섯에서 열 번째 계명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5계명은 부모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6계명은 살인하지 않으며, 7계명은 간음하지 않아야 하며, 8계명은 도적질하지 않으며, 9계명은 거짓증거하지 않는 것이며, 10계명은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6계명에서 10계명은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3:8-9).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본질은 공평(righteousness)과 정의(justice)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하여 공평과 정의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89: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의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영적이고 도적적인 기준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는 삶이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욥은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을 잘 섬겼을 뿐 아니라,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는 일에도 힘을 썼습니다. 욥은 자신이 어려운 자들을 도운 것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29:12-16). 욥은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을 진실되게 예배했을 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자의 친구가 되는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십계명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본질은 바른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웃 사랑의 실천적인 삶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랑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19:17).

 

십계명에서 6계명은 살인하지 말찌니라.”(20:13)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 자신의 피를 흘려야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9:6). 의도적인 살인은 속죄제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자는 형제를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기 1917절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19:17). 왜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가요? 미움은 마음에 형제나 이웃에 대하여 증오의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시기하여 형제인 아벨을 미워하였고, 그 미움이 싹이 나서 자람으로 살인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울도 다윗을 시기하여 미워하였고, 그 결과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이유가 시기와 질투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로 인한 미움일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는 너는 네 백성 중에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19:16)라고 했습니다. 즉 백성 중에서 다니며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논단하지 말며는 이웃을 비방하며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9:18)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을 포함합니다.

 

로마서는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은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0-21). 우리가 도리어 원수에게 양식을 주고 물을 마시우게 하는 것은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은 것과 같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숯불은 요리를 하고 밤에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소중한 불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숯불을 나누는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사랑은 성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찌니라.”(20:14).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찌니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서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의 결혼은 육체적인 연합으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육체의 연합은 성적인 연합으로 자녀를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간음의 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트리는 사회의 근본적인 악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간음의 죄에 대하여 언급한 몇 군데가 있습니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하여 장자의 특권을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는 간음의 죄를 범하였고,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가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에서 간음은 바알 우상 숭배와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8장은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18:3)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바알과 여신인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의식에는 신전의 사제들인 남성이나 여성들과 음란한 행위에 포함되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딸을 신전의 사제로 보내어 매춘부가 되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네 땅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19: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 성적인 순결을 지켜서 부정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찌니라.”(18:20).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18:22).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18:2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땅이 더러워져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4-25). 하나님께서 소돔성의 성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처럼, 가나안을 심판하신 이유는 우상 숭배와 간음의 죄로 그 땅을 더럽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압 여자들의 유혹을 받아 음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음행의 죄에 빠져 바알에게 제사하며 모압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우상에게 절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염병을 보내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5:28).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관계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최근에 사회는 성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결혼의 언약 외에 어떠한 성적인 접촉은 간음을 행하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항상 정결하여 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사랑은 도적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찌니라.”(20:15).

 

도적질은 타인의 것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타인의 것을 훔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율법에서는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23:4-5). 사랑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반드시 돌려주고, 나귀가 짐을 과도하게 짐을 져서 엎어지면 그 짐을 지도록 함께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적질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중에 가난한 자에게는 채주 같이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22:25-26).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우리도 이웃을 향하여 자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의 옷을 전당잡았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옷이 가난한 자에게는 저녁에 이불이 되어 추위를 피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추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더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아야 했으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아서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어야 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19:9-10). 하나님이 주신 추수의 열매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남겨 두어서 함께 나누는 것이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하여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가 베푼 인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심으로 보아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한 자에게 자신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을 권세로 억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품군의 삯을 미루지 않고 지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9:13-14). 우리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아야 하며, 소경 아에 장애물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약자를 존중하는 것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20:16).

 

하나님은 진리 되셔서 거짓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탄이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했듯이, 거짓말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레위기는 주의 백성이 속이고 거짓말 하며, 거짓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도적질 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19:11-12).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진실된 마음과 뜻을 품고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재판이나 시장에서 공평한 저울과 추를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19:35-36). 우리는 재판에서나 장사를 할 때나 공평한 저울을 사용하여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얻으려고 거짓된 저울과 추를 사용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항상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진리를 행하게 인도하십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가 되어서 말씀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진리를 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거짓말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뢰를 잃게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로 교회와 성령을 속였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고 문둥병에서 나은 나아만에게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가져와 숨겼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를 속이고 나아만에게서 취한 물건으로 인하여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항상 정직한 마음과 입술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항상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주셔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된 사람이 되도록 소망해야 합니다.

 

6. 사랑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20:17).

 

탐심은 통제되지 않는 이기적인 욕망(desire)을 의미합니다.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은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것이 아닌 이웃의 소유에 대하여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소유는 이웃의 아내나 종, 소나 나귀와 같은 소유를 의미합니다.

 

탐심은 마음에 품은 죄의 씨앗입니다. 이 나쁜 씨앗이 자라면 살인과 간음, 도적질과 거짓말을 하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면 살인이나 미움을 버리게 됩니다. 탐심을 버리면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탐심을 버리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도적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다가,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나봇을 죽였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합왕과 이세벨을 심판하셨습니다. 탐심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죄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탐심을 품어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영혼은 지옥에서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아간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후에 외투와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자신의 장막에 숨겼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탐한 것입니다. 그 죄로 인하여 아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탐심을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했지만, 탐욕을 품게 되자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골로새서는 탐심을 땅에서 제거해야 할 지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3:5). 우리가 탐심을 품는 것은 하나님 외의 것을 더욱 사랑하게 하는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하기에, 그리스도인은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우리가 만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함으로 항상 만족하는 삶이 탐심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로마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5계명에서 10계명이 다 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