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강해(71) - 자신을 높이려는 종교심을 경계하라(마 23:1-12).

비전의 사람 2021. 5. 1. 18:23
728x90

마태복음강해(71) - 자신을 높이려는 종교심을 경계하라(23: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1-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신 날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둘째 날에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시며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면서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셋째 날에 주님께서는 다시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인 군중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찾아와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비유로 답변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세 가지의 비유에 대하여 세 가지의 질문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공격에 대하여 답변하셨고,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오시는 메시야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25장을 통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시며 사역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설교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시며, 종말에 일어날 사건과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누구인지를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이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는 여러 가지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에 약 6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무척이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대제사장과 제사장직을 지키면서 정치적으로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은 정치적인 그룹으로서 로마인들이나 로마와 협조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센파는 광야의 수도원에 생활하면서 사회에서 분리하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헤롯당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헤롯왕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70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때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이때 몇몇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후에 율법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해설서를 50권 이상씩 기록할 정도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설하면서 의식과 규율을 적용하도록 많은 추가적인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 자체가 율법에 속해 살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했고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주님의 눈으로는 그들이 외형적으로는 종교적인 지도자로 추종받았지만, 교만하고 거짓이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 이에 주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며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를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1. 그들은 가르치는 대로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23:2-3).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판단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모세의 권위에 앉아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리를 의미했습니다. 당시에 회당에는 모세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특별한 자리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판단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8장은 이튿날에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섰는지라.”(18:13). 모세는 자리에 앉아 백성을 재판하는 일을 했기에, 바리새인들도 동일하게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율법을 해석하며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말한 대로 행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23:2-3)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며 사람들을 재판하는 일은 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21-23). 유대인들을 다른 사람을 가르쳐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지 말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그러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권위의 목적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 주신 권위의 목적이 높임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함이며 영적인 지도자로서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23:11).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 분의 종들이 말씀을 가르치는대로 살아가며 섬기기를 기대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를 향하여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이는 교회를 섬기는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 그리고 직분자와 목자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가정에서 자녀들을 인도하는 영적인 부모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9)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행실을 배울 수 있도록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행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고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2.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주는 칭찬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영예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23:5).

 

영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교만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신의 외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이하여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했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23:5).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경건을 나타내고자 하는 모습을 책망하셨습니다. 경문은 성구함이라고 불리우는 플락터리(phylactery) 또는 테피린(tefillin)이라고 하는 작은 가죽 상자였습니다. 이 작은 상자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당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라는 말씀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68절에서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라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경문이라는 가죽 상자를 이마와 손목에 매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상징하는 경문을 크게 함으로 자신이 더욱 경건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옷술은 옷의 끝에 다는 타슬(tassels)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15장에 옷술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15:38-39). 하나님께서 옷술을 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게 하는 상징이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옷술을 붙으신 옷을 입으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8:44). 예수님의 옷가는 바로 옷술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마에 경문을 달게 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되게 하셨고, 옷에 옷술을 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는 상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래새인들은 말씀을 지키기 보다는 자신들의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하며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6,7)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잔치하는 자리에서 높은 자리를 않는 것을 좋아했고, 심지어 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유대교 회당에는 예배자들이 앉는 의자 앞에 돌로 만든 의자를 놓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앉도록 구별했습니다. 그들은 종교 생활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므로 자신들을 구별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람들로부터는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랍비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명예로운 직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1-2).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자로서 항상 낮은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은 바리새적인 행동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3. 그들은 사람들보다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호칭인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러한 명예로운 호칭을 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생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선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로를 향하여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모습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 같이 높은 자리를 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높은 섬김을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스승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서 세상의 계급과 같이 높거나 낮은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평등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23: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는 육신의 아버지를 지칭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비는 당시에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자를 의미했습니다. 권위있는 스승을 향하여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중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육신의 아버지 보다는 바리새의 스승들을 더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지금도 신부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의미에서 father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땅에 있는 스승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아버지는 한 분이신데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외에 랍비와 같이 권위있는 스승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써 복음 전했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로 자신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22:10)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인도하는 영적인 스승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참된 스승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지칭합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참된 스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배우며 진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승이 되면 사람은 항상 잘못 될 수도 있고 잘못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기에 그 말씀을 배우며 묵상하며 사랑함으로 그 분의 가르침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허영과 자만심을 책망하신 후에 제자들이 취해야 할 마음의 자세를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1-12).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종의 자세를 가지고 겸손히 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모습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주님이 영광 받으시며 우리의 영적 권위는 더욱 세워지는 것입니다.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속은 시신의 썩음 같이 죄가 가득하지만, 겉으로는 화려한 종교적인 치장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사람들의 칭송이나 자기 자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는 겸손과 섬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인 지도자의 모습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낮추어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