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란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건강이 무너짐으로 찾아오는 육체적인 고통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아오는 상처와 배신, 어려운 환경에서 찾아오는 마음의 절망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관점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고통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찾아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를 위해서 장차 나타날 영광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미래에 약속하신 영광을 소망하며 현재의 고난을 인내해야 합니다.
1.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은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피하여 숨기 시작하였고,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아내는 잉태하는 고통으로 자녀를 낳아야 했고, 남자는 종신토록 수고하여 소산을 얻어야 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6-17). 죄가 가져온 가장 큰 고통은 사망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큰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이 세상에 들어온 죄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피조물의 화목을 깨트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죄로 인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죄로 인하여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잘못된 가르침을 주기도 합니다. 이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삶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인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하신 영광을 우리는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모양으로 사셨지만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에 속한 형체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환난은 우리에게 임할 영광에 비교하면 잠시뿐이고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우리에게 임할 영광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물이나 고통, 사망이 없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누릴 영원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처소를 입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주실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이 나타나실 대에 예수님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실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거하실 때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배고픔과 더위와 추위, 그리고 외로움의 고통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부패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자 크게 분노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육체의 아픔과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즐거움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현재에 당하는 고난을 인하여 낙심하기 보다는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피조물도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영광에 이르기를 기다립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피조물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의미합니다. 고대하는 것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고통을 당하는 연약한 육신이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시기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나타날 때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진정함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이유는 피조물도 그 날에 피조물의 썩어짐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하자 피조물이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7-18).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피조물의 온전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피조물이 썩어져 종노릇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허무는 자기 뜻이 아니라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현재의 피조물들도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피조물이 썩어지는 고통의 시작은 인간의 죄의 시작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에는 다시 영광의 자녀로 이 땅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됩니다. 그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 입니다. 이때 피조물들도 썩어짐에서 벗어나 영광에 이를 것에 대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메시야가 오셔서 이 땅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때는 피조물의 영광이 회복되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며 아이와 독사가 함께 장난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는 해가 되거나 상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이 때가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때 입니다.
3. 우리는 몸이 구속되는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이 시대에 우리 뿐만 아니라 피조물도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나타날 때에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피조물 뿐 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구속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성령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으면 성령으로 인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보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우리 안에 이루어진 새생명의 구원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곧 영화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후사의 모든 특권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에게 하나님이 양자로서 외적으로 보여지는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말씀만을 따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그 분의 영광이 숨겨졌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의 양자됨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의 구속은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그분과 같이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광의 몸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변화되는 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의 몸이 부활할 때에 영적인 몸으로 변화될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44,51).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영화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것인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열매를 주셔서 인치시고, 주님이 오시는 날 몸의 구속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약속의 말씀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 8:24-25). 우리의 구원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합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믿음으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보이는 것은 잠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일시적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기에 이 땅에서의 환난은 가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몸을 구속하시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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