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령

왜 위대한 구원인가? (So Great Salvation).

비전의 사람 2021. 3. 27. 20:14

왜 위대한 구원인가? (So Great Salvation).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2:3).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불렀습니다. 큰 구원을 영어 성경에서는 위대한 구원(the Great Salv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시게 주님이 주신 구원을 등한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간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기에 우리는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위대함 만큼 우리에게 큰 은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 우리의 구원이 위대한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구원이 위대한가요?

 

1.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우리가 받은 구원이 위대한 이유는 세상에서 가르치는 가치나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교의 구원은 선한 행위나 의식, 율법의 준수 등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여 부처와 같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하나님이 없고, 우주의 원리를 깨우치고 마음을 비워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가 석가모니 외에도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여래 등등이 있습니다. 인간이 깨우침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7세기에 설립한 종교입니다. 알라 신을 믿으며 예언자 마호메트를 추종합니다. 이슬람은 원죄를 부인하고 있고,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의 계율을 지키고 선한 행위가 많으면 구원을 받지만, 악한 행위가 많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행위로 인하여 천국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나 이단은 행위가 주체가 되어 영혼이 지옥과 천국을 가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한 행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이는 행위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행위 구원입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했고, 자신들의 경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철저하게 정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아무리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과 같이 속은 겉은 깨끗하게 보이지만 속은 시신이 썩듯이 죄가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자리에서 대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대한 구원을 위하여 큰 희새을 치루셨습니다. 아들을 희생하신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희생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저를 통하여 구원받은 한 청년의 간증이 저에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지만, 저에겐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사역하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면 언젠가 구원해 주실꺼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그 혼돈과 혼란 속에 있을 때 너무 감사하게도 목포성서침례교회 목사님이신 이성진 목사님께 구원상담을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구원 상담에서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 자리에서 저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멀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너무 사랑하심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저희 모두의 죄를 위해 희생하셨고, 믿기만 한다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의 믿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장하고 싶었고, 너무 감사하게도 강남성서침례교회에서 김석수 목사님께 성경공부를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청년의 간증과 같이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는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얻은 구원은 위대한 것입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망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아담이었습니다. 그가 죄를 범하자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를 범하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기게 빛을 떠나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먼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둘째 사망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둘째 사망인 영원한 형벌에 떨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죽은 모든 사람은 최후의 심판인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영원히 타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20:14-15). 누구든지 죄 가운데 죽은 자는 둘째 사망인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위대함은 무엇인가요? 구원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때문에 위대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예수 그리스도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영혼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은 구원받은 자에게 찾아오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어두움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 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에 이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영생을 얻은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에 옮겨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3.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느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6:4).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사람이 되는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의 변화를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살아가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담 안에서 살아가던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다시 사심같이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삶의 모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25: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성막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말씀을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는 장소이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 안에 처소를 마련하셔서 사십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서 계시기에,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은 금과 은과 조각목 등의 재료를 만들었지만, 그 곳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신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성전 삼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은 믿는 자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가장 쉽게 설명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되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귀하게 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희생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우리는 종의 모습으로 희생하며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십니다. 구원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연합하는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4.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8).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사탄으로서 죄를 범하는 자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고 다스립니다. 사망의 길은 비참한 죄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 즉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렸듯이, 우리도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은 약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자녀들과 가나안 땅과 메시야가 후손으로 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모두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녀에 대한 약속도 25년이 지나서 이삭을 낳음으로 응답받았고, 땅에 대한 약속도 사라의 무덤으로 사용할 헤브론의 막벨라 굴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그는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으르 예비하셨느니라.”(11:16).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대부분이 성취가 되었고, 앞으로 메시야가 오심으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셨고, 이스라엘 민족이 수백만 명으로 성장하였으며, 이스라엘 자손으로 메시야가 나셔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다가올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 약속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영광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장차 주실 영광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광은 우리의 몸이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8:23). 우리가 속으로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몸의 구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가져다 주실 몸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게 된 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영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은 우리가 사망에 거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본향인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원한 처소는 새 예루살렘인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사망이나 애통함이 없으며 아픈 것이나 죄가 없는 곳입니다. 사탄은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기에 더 이상 사람들을 죄로 미혹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위대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구원하시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7-1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보내셔서 믿지 않는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며, 죄 사함과 주님을 믿어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심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역의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