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80) -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알라(마 26:1-16)

비전의 사람 2021. 7. 2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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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80) -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알라(26:1-16)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26:2).

 

마태복음 26장에서 18장 까지는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장들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6장에서 28장 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클라이막스는 구속의 역사의 정점인 십자가의 사건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계 역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고, 인류를 위한 소망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의 중심으로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형들로 가득합니다. 아벨의 제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하시는 십자가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고, 노아를 구원한 방주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 대신에 드린 수양에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 희생된 유월절 어린양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르비딤에서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한 것에서 십자가의 모형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또한 레위기에서 가르치는 희생 제물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장대에 메달린 놋뱀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라고 하셨습니다. 침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모두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는 십자가의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26:2). 주님께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하여 가르치신 사건은 수요일에 일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에 주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대면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감람산에 오르셔서 제자들에게 그 분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감람산에서 가르치신 주님은 이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고 주님은 그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전에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에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16:2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의 죽임에 대하여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2-2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26:2).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신 주님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 종교인은 예수님의 존귀함에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26:3-4).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획되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희생하시는 그 분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사야 53절에 너무나 자세하게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이사야 53장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에 세상은 그 분을 거절할 뿐 아니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이 태어나시자 그분을 죽이려고 했기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세 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나사렛에 들러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큰 언덕으로 끌어가 떨어드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목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안식일에 병고치신 것을 핑계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와같이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그 분의 계획대로 사역을 진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5, 1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권세는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놓으셨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 자신의 권세를 내세우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19:10-11).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가 비록 총독이라도 나의 죽음에 대한 권세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님의 때는 유월절의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의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약 256,500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양에 약 10명의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며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요세푸스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최소 2백 오십 만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신 사역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라고 주님을 칭송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가 듣게 하시며, 아픈 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메시야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인기가 있었기에, 유대의 지도자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시자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모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했기에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26:5)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면서 유월절 기간에는 그 음모를 실행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유월절 기간에 죽임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할 때에 희생된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이틀 뒤인 금요일이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며 양을 잡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월절 양을 잡아 절기를 지키면서도, 그 양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비록 대제사장들은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을 죽이면 혹시나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월절이 지난 후에 기회를 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기간에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7절은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기 위하여 유월절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비록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의 기간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유월절의 기간에 어린양이 되어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지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시는 시간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26:4).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임은 산헤드린의 모임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스라엘의 최고 결정기관으로 71명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기관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던 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의논을 하면서 유월절 기간에는 말자고 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궤계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에 위협을 느꼈고 시기와 질투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그들의 부패에 대하여 책망하셨기에 주님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아론의 자손들 중에서 거룩히 구별하여 세워야 했지만,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는 로마에 뇌물을 주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안나스는 6년부터 15년 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고, 가야바는 15년부터 37년까지 대제사장직을 감당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대제사장직을 지키기 위해서는 로마와 정치적인 결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부패했습니다. 안나스도 사위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주면서도 자신도 대제사장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를 함께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왕이 없었기에 로마의 총독의 영향력 아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직은 정치와 종교의 힘을 가진 절대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홀로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와 희생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였고 수많은 제사장들에 대한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마태복음 2614절에는 제자들 중의 한명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226:14-1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심십에 팔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22:3-6)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자,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았던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은 삼십에 파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다는 군중들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잡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혼자 있는 시간을 대제사장에게 알려주어 조용히 주님을 잡아갈 수 있기 때문이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은 삼십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하여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14: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셔 죽음을 당하시지만, 가룟 유다는 사탄에게 미혹되어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파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제자로서 영광의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배신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로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지만 마음에는 탐욕과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가인이 사탄의 악한 길로 행하여 하나님을 떠났듯이, 대제사장들과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까이 두고서도 그 분의 하나님 되심과 존귀함을 깨닫지 못했기에 영적인 어두움에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어리석은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음의 등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등불을 켜서 마음이 빛 가운데 거함으로 진리를 분별하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사람은 존귀한 주님께 소중한 것을 드립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26:6-7).

 

마태복음 266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섬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의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일어났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베다니에 오신 첫 날인 토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이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에 주님께서 초청을 받은 것은 시몬이 더 이상 문둥병에 고통당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느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전에 오셔서 시몬의 문둥병을 고쳐주셨을 것이고, 그 보답으로 주님이 베다니에 오시자 그의 집에 초청하여 식사로 섬기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시몬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와 다른 열두 제자를 초청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몬의 집에 오시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26:7). 주님께 매우 구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온 여인은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2:3). 즉 마리아가 예수님께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서 그분의 존귀함을 높였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주님께 드린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일년 품삯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손님이 집에 오면 물로 발을 씻어주거나 향유를 머리에 붓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일반적인 관행을 넘어 나드 한근인 향유의 값진 것으로 주님의 머리에 붓고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왜 그녀는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을까요? 그 이유는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이 곧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12:2). 마리아는 누가복음 10장에서 말씀을 잘 듣는 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10:39-40).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였기에, 시몬의 집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주님의 죽으심이 임박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 섬긴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마리아의 행위에 분노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26:8-9).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 제자는 가룟 유다라고 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4-6).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자 중에 돈 궤를 맡은 자인데 그것을 훔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죄에 빠져 있었기에 예수님께 드려진 향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계약을 맺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귀한 예물과 복음을 위하여 쓰임받는 헌물에 대하여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자신의 소중한 향유를 깨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향유를 드려 예배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드린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세상의 주가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귀한 향유를 드려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26:10-12).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항상 너희와 함께 있기에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항상 함께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다가왔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결국 하늘로 다시 승천하여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가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한 자는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미리 향유를 부으셔서 그 분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26:13). 주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일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행한 아름다운 헌신을 기록하여 그녀의 헌신을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소중한 향유를 드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한 마리아의 믿음을 영원히 칭찬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팔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을 배신하였고 종교 지도자들은 궤계로 주님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주님의 은혜를 입은 마리아는 자신의 소중한 향유를 부어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 자신의 소중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솔로몬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지만 예수님이 성육신 하시자 그 분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성전은 우리 성도와 더불어 교회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곳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 분을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을 예배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