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85) - 주님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마 26:47-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가룟 유댜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에서 예수님과 친밀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실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했던 가룟 유다부터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거나 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붙잡혀가시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떠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도리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과 성전을 지키는 성전 경비대일 수도 있습니다. 성전 경비대들은 칼과 곤봉을 사용하여 성전의 질서를 지켰습니다. 이때 그들은 강도를 잡으러 온 것처럼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성전에서 강도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붙잡혀가시는 모습에서 가르치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주님이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마 26:49).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제자들의 배신이 있다는 사실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핍박이 찾아오면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주를 위하여 믿음을 선택함으로 고난의 대가를 기꺼히 치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신에 핍박이 찾아오면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과 같이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배신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 지점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고난이 시작되는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지난 삼년 반 동안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따랐지만, 그들의 헌신이 위기의 상황에서는 흔들리고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음에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는 겉으로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존경심을 보였지만, 뒤로는 무리들이 잡아가도록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스승을 향한 친밀감과 존경감의 표시로 입맞춤(kiss)을 하곤 했습니다. 즉 가룟 유다는 외적인 헌신의 표시를 사용하여 주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마음에 더 큰 아픔을 가져다 주는 배신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인사만 하면서 주님께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속으로는 주님을 배신하여 죽임에 넘기면서도, 겉으로는 주님을 향하여 친밀함과 존경심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거짓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잠언서는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는 아첨과 위선의 말을 하면서 뒤에서는 비방하거나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 중에 요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사울의 군장 아브넬은 이스보셋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찾아와 그에게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요압이 아브넬을 만나 조용히 말하는 척 하다고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겉으로는 인사하고 대화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그를 죽일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말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이복 형제인 암논에게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연회에 초청한 후에 자신의 부하들로 암논을 쳐서 죽게 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잔치에 형제들을 초청한 후에 속으로는 칼을 갈고 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재판을 받으러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맞춤을 하며 친밀감을 표시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다윗을 배반하게 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속이고 그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처럼, 압살롬이 다윗과 암논을 속여 그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거짓 입맞춤을 하고 그분을 배신하여 죽음에 넘겨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실함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충성스러운 자가 될 수가 있고 배신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친밀함과 존경심을 겉으로 표현했지만, 실상은 악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말세에 일어나는 모습 중에 하나를 “배반하여 팔며.”(딤후 3:4)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유익이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향한 신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잠 25:19)라고 했습니다. 신실하지 못한 자는 자신을 믿는 사람을 향하여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과 같은 자가 됩니다. 위골된 발은 자신의 몸을 지탱시켜 주지 못하고, 부러진 이는 음식을 소화하도록 역할을 못합니다. 이와같이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는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 25:13). 우리는 추수하는 날에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믿음을 배반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함께 동역하는 믿음의 지체들을 향하여 신실함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사랑의 입맞춤을 하면서 속으로는 악을 품거나 도모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서로 비방하거나 중상모략하는 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2. 우리는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마 26:51).
가룟 유다와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주님은 “친구야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 중에 하나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요한복음은 검을 뺀 자가 베드로이고,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뺀 이유는 그들과 싸워서 예수님을 지켜서 잡혀가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종의 귀를 자르려고 하기 보다는, 주님을 잡으러 온 종의 목을 베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칼을 휘두르자 종이 가까스러 피하자 칼이 귀를 스쳐서 귀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귀를 만지셔서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꽃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검으로 무리들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면 주님은 열두 영 되는 천사를 보내셔서 이기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보통 로마의 한 군단이 6,000명이기에 열두 영은 12만의 천사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의지적으로 무리들에게 붙잡히신 것은 아버지께서 부르신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비롯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칼을 쓰는 것과 같이 폭력을 거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일언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2-54).
주님께서는 혈기로 싸우는 폭력을 세 가지의 이유로 반대하셨습니다. 첫째,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검으로 싸우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제자도였습니다. 제자의 대가는 저항없이 믿음을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칼을 들고 싸우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고후 10:3-4)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대로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원하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하여 혈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탄이며 또한 육신의 혈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기나 분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함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즉흥적으로 칼을 들고 주님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는 도리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주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보다는 혈기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혈기를 드러내며 육신으로 싸우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채찍질을 당했지만,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적인 저항없이 믿음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에 제자의 삶임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0-21). 겟세마네에서 베드로는 칼을 들고 말고라는 종의 귀를 베었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서 변화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폭언이나 폭력, 그리고 육신의 다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아버지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폭력 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것입니다. 한 영은 로마의 한 군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약 6,000명의 군사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기도하여 도움을 요청한다면 천사의 큰 무리를 보내셔서 도움을 주실 것을 아셨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야가 있는 있는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그러자 사환인 게하시가 두려워 엘리사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자신과 함께한 자가 아람 군대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사환 게하신의 눈을 떠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여심으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탄 천사를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이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혈기를 가지고 육체대로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곁에서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감정과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를 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게 하며 혈기나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4). 주님이 육체의 폭력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이 우선 순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이 와서 도와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치신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함을 아셨기에 기꺼이 그 잔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고난과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
예수님께서는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를 향하여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지만, 그가 지금 행하고 있는 죄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검으로 대적하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육신의 혈기로 주님을 섬기려는 것을 단호히 배척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향해서는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비겁한 행동을 책망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이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는 주님을 대적하지 못하다가, 주님이 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잡으러 왔던 것입니다.
무리들은 사람들이 없는 밤에 마치 강도를 잡으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을 잡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며칠간 예루살렘에 오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무리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때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기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기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제자들을 제압하려고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제압하여 강제로 포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는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잡혀가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마 26:56).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자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핑계를 대며 변명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이유가 세상적으로 수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는 염소가 고집을 부리다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말이 주인을 태우고 평야를 힘차게 달려가듯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는 자는 사탄의 종이 되어 사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루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뜻을 감당하는 것을 은혜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과 같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과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배신하고 떠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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