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마 26:57).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 의하여 잡혀 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로마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요 18:13). 무리들이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의 집으로 끌고 간 것은 안나스가 배후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내어 그의 집에서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의하여 세워진 기득권 세력이었고 성경을 바르게 믿는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은 당시에 부활이나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구약의 모세오경 외에는 성경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운영하는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모으는 정치와 경제의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보내서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가야바는 전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가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47, 50).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미리 결정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언급한 이후부터 저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한 후에 그들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잡아서 가야바의 관저로 끌고왔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고난의 첫 걸음을 시작하십니다. 가야바 관저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서 거짓된 입술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마 26:57).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관저를 끌려 가셔서 재판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71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기구였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마 26:57,59). 유대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은 공평과 정직으로 재판해야 했지만,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판은 불법이었고 재판의 내용도 거짓 증인을 포섭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각 마을에 재판을 할 수 있는 법정을 두었습니다. 지방의 마을에는 3인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최하위 법정이 있었고, 남자가 120명 이상인 경우에는 23인의 재판관들로 구성된 법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으로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그리고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공평한 재판은 무척이나 소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평한 재판을 위하여 다음의 절차를 지켜야 했습니다. 첫째, 재판은 공개적으로 열려야 했습니 다. 이는 재판관들이 비밀리에 법정을 열어 판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재판은 방청객이 있는 상황에서 오픈되어 진행함으로 진행상황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하기 위하여 밤에 급하게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낮 시간에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재판은 공식적으로 밤에 열릴 수 없었고 낮 시간에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밤에 급하게 재판을 진행한 후에, 다음 날 새벽에 공식적인 모임을 개최하여 형식적인 절차를 갖추었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눅 22:66). 특히 재판은 안식일이나 절기의 전날에는 거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월절 절기에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들이 급하게 진행하려고 했던 이유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기에 신속하게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유월절 절기에 처형함으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재판은 공정하게 판결해야 했습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이 공정하게 재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신 16:18-19). 공전한 판결을 위하여 재판에서 피고는 자기를 방어하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했습니다. 피고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변호하는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고 때로는 재판장 앞에서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거짓 증언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하여 두 세 사람의 증인에 의한 증거만이 채택될 수가 있었습니다.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없다면 그 증거는 재판에 채택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재판에서 한 사람의 잘못된 의로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두 세람의 증인이 없으면 어떠한 판결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증거하면 거짓 증거한 사람이 자신이 거짓 증거하려한 사람의 판결을 대신 받아야 했습니다. 즉 자신이 거짓으로 어떤 사람이 살인했다고 증거했지만 거짓으로 판결이 난다면, 그 자신이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신명기 19장 16-19절은 진실된 증인의 중요성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 19:15-19).
이와같이 하나님은 거짓 증거하시는 것을 이스라엘에서 없애야 할 악으로 정의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과학 수사나 cctv 같은 첨단 장비의 도움이 없었기에 증인의 역할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증인들의 거짓된 한 마디에 피고인은 억울하게 사형당할 수도 있었기에 증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은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의 재판에서 공평하게 재판해야 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공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리 죽이기로 결정했기에,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게 할 죄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게 할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서 거짓으로 예수님을 모함하게 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마 26:59). 이와같이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의 행동까지도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운 거짓 증인은 거짓이었기에 서로 말이 맞지 않았습니다. 두 세사람이 같은 말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틀린 것입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마 26:60). 거짓 증인으로 인한 모함을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기로 하는 결정을 이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거짓 증거는 유대 사회에서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하여 거짓 증거로 인하여 그들이 사형을 선고 받아야 했고, 거짓 증인을 세웠던 대제사장이 도리어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9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 20:16)라고 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계명이 바로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손해를 끼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비방하거나 거짓 증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시편 15편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시 15:2-3). 우리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행하며 의롭게 행동하며 진실을 말하며 혀로는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가장 거룩해야 했지만 가장 부패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거짓 참소하며 모함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서로를 향하여 진실만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재판도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관원들의 불법으로 이루어진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이와같이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하여 어두움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거짓의 죄악들이 우리에게는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거짓 증거들이 우리의 입술에서는 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서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그들은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 위한 거짓 증거는 자신의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사람들을 미리 매수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게 했습니다. 거짓은 진실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말은 서로 맞지가 않았습니다. 많은 거짓 증인이 왔지만 하나도 신뢰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이 다시 와서 증거했습니다.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마 26:61).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으로 하신 말씀을 가지고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이신 자신의 육체를 가르켜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로 오셨기에 그 분의 육체는 바로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시는 것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성전에서 공적으로 하셨기에 고소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증거가 거짓되거나 사형에 처할 이유가 되지 않자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여 죽일 구실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마 26:62-63). 대제사장은 재판의 규율에 따라 예수님이 변호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향한 고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자신에 대한 고소가 공정하지 않다고 변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변호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주님을 함정에 빠트릴 질문을 하였습니다. “ ...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맹세하게 하여 곤경에 빠트리려고 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기에, 그의 질문에 답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야바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십자가형으로 처형할 생각이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께 그분이 메시야이신지 질문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주님께서는 가야바에게 네 입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감추셨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니엘이 메시야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다니엘이 예언한 메시야로 오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메시야가 구름을 타고 오셔서 하나님이 나라를 세우실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 7:14).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인도된 후에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주셔서 천년왕국을 다스리게 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로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선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던 대제사장에게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 죄로 사형에 처하게 하는 기회로 삼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거짓 고소에 대해서는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이 땅을 천년 간 통치하신 후에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에 대해서는 변호하지 않으셨지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메시야라고 분명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당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하여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눈치를 보기 위하여 믿음을 부인하거나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7-68).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인자라고 하시자 자기 옷을 찢으며 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마 26:65). 그리고 다른 산헤드린 공회원에게 그들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참람한 말이란 신성을 모독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며 구름을 타고 오신 메시야라고 하자 주님이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자 공회원들이 예수님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되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마 26:66).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대제사장의 음모에 가담하여 미리 사형을 내릴 것을 작정했습니다. 그들의 재판 절차 자체가 밤에 시작되는 것도 불법이었고, 증인들도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어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주님의 입술을 통하여 스스로 메시야라고 고백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이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신성모독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스스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양심의 깨우침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어두움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도리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판결을 내렸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롬 2:1)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판단하면서 그 판단으로 도리어 자신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사형에 해당한다는 말을 한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7-68).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자에게 미리 매질을 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때리며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며 그리스도야, 즉 메시야라고 하는 자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라고 하면서 심한 모욕의 말을 하였습니다.
어두움의 권세가 힘을 합하여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세상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반역을 도모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약해 보이는 예수님을 짓밟음으로 인하여 승리의 감정을 느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가 어두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제하여 하나님의 권세에 총공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리리로다 ...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지노가 급하심이라...”(시 2:1-4, 12).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조롱은 비겁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으로 약해지신 주님을 도리어 짓밟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방어 능력이 있으셨지만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때리며 조롱하고 모독하는 그들을 현장에서 지옥으로도 보내실 수 있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기에 하나님이 주신 잔을 마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멸시를 받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질고를 당하심으로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분을 귀히 여기지 않은 것은 당시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도 주님이 고난 당하실 때에는 모두가 도망하였고 그 고난에 아무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모습에서 종의 자세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종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우리를 섬기시는 종이 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조롱을 당하거나 멸시를 받아 괴로우실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분의 모습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의 자세는 우리를 섬기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연합되어 살아가기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우리가 자신을 쳐서 복종함으로 종으로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종으로서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억울한 일도 참아야 하고, 고통도 인내하며 지속적으로 주님이 부르신 부름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낮아져야 하며, 주님과 같이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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