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87) -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배신(마 26:69-27:10).

비전의 사람 2021. 10. 16. 16:33

마태복음 강해(87) -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배신(26:69-27:10).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성경에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섬기던 주를 배신하고 파멸에 이르는 사람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시는지요?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믿음을 배반하고 주님을 떠나는 자의 삶을 사기를 원하시는가요? 우리 중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폴리캅은 A.D. 80년에 태어나 165년에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에 의한 핍박이 가속화되고 있었고 폴리캅도 잡혀서 화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그가 로마의 황제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살려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86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군인은 폴리캅을 산 채로 불에 태웠습니다. 폴리캅은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죽음의 대가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가장 예수님을 지지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배신은 그를 알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자신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의 충동적인 성격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 칭찬을 들었지만,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인하여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아찔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맹세하며 부인함으로 제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부였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배신하여 죽음에 넘겨준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미리 계획하여 범죄함으로 그의 죄는 씻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무죄한 예수님을 팔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익스피어는 배반당하는 자는 배반으로 상처를 입게 되지만 배반하는 자는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놓여지게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배반하는 사람은 자신이 배반하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넘어진 상황에서 다시 회복하는 성경의 원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26: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끌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로 끌려 가실 때에 따라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 집 뜰에 가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라고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뒷걸음을 치며 대제사장의 뜰에서 문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며 예수님을 다시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부인했다가, 이제는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한 어린 소녀가 베드로에게 질문했고, 두 번째는 한 어린 소녀가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함께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추궁했습니다. “너는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이제는 사람들이 그의 말이 그가 갈릴리 사람인 걸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아람 방언의 액센트가 있었기에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말투가 틀렸습니다. 그들은 북쪽 지역인 갈릴리 지역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곤경에 빠진 베드로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다시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26:74). 베드로는 세 번째로 주님을 부인할 때에 저주하는 맹세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맹세하건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며, 만일 자신이 예수를 아는 자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맹세로 저주를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측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는 맹세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저주하며 죽이려 했듯이, 자신도 그들과 같이 예수님을 저주하는 자로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 뿐만 아니라 양심까지도 모두 포기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세 번째의 부인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가르침에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4, 37)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결코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맹세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저주하는 맹세를 함으로 자신에게 저주를 가져오는 큰 위험을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하수들 앞에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베드로의 주를 고백하는 믿음이 순식간에 자신의 주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의 맹세를 하는 영적인 파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앞장서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5:3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베드로는 평안의 시기에는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이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그 분이 너무나 위대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잡혀가 사형을 언도받는 현장에서 큰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잠재되어 있던 자기 보호 본능이 믿음을 압도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난 후에 닭이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베드로는 주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자 밖에 나가서 심이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어떠한 의미였을까요? 베드로의 울음은 회개의 애통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와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믿음의 여정에서 큰 위기를 맞아 영적인 파산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회복하지 않는다면 아나니아나 삽비라, 또는 가룟 유다와 같이 영적으로 파산하여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적으로 파산하는 자신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배신을 알았지만 자신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배반할 줄 아셨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함께 기도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한 주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베드로는 위기의 상황에서 믿음이 떨어져 주님을 부인할 것은 주님이 아시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신 다는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다시 회개한 후에 형제들의 믿음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회복한 후에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갈릴리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 지상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자 그 날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했다 할지라도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한 열정을 품고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 받도록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사명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했다면 통곡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돌아가야 하며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했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27:3).

 

새벽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했습니다. 이는 새벽에 유대 사회의 합법적인 판결이 낮에 이루어져야 했기에 이른 새벽에 다시 모여서 사형 판결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기에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보내 사형을 언도받게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시고 사형 판결을 받으시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이 정죄받아 사형에 넘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27:3-4). 가룟 유다는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장본인이었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그의 마음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결박되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그의 종들이 예수님을 때리며 조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빌라도에게 끌려가셔서 십자가형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자신이 한 범죄에 대하여 크게 뉘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죄 없으신 분이 거짓된 대제사장에 의하여 누명을 씌여 죽임에 넘기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을 향하여 내가 무죄한 피를 흘려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725절은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음으로 저주를 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입으로 무죄한 피를 판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다시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은 삼십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 ...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27:4). 그들은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은 삼십을 돌려주자 그것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뇌물로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빼앗은 자들입니다. 즉 그들은 가룟 유다와 공모하여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듯이 그들도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 했습니다. 적어도 가룟 유다의 양심은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책임감이 있었지만 그들의 양심은 차가운 얼음과 같이 냉담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성전의 뜰이 아니라,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던졌습니다. 그는 적어도 은 삼십을 그들에게 던지며 그들을 모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을 빠져나와 기드론 골짜기 근처의 큰 바위에 올라갓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목을 매어 자신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명으로 신뢰받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뢰를 조금씩 깨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돈 주머니를 맡은 자였지만 조금씩 그 돈을 훔치기 시작했고, 결국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면서까지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는 그의 생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양심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가득했던 불신과 탐심으로 인하여 결국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넘겨준 그 죄는 너무나 컸기에 그의 양심이 자신의 죄를 용납할 수 없었고 스스로 선택한 사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있다면, 구약에는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책사였고 무척이나 신뢰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하자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편에 서서 자신이 섬기던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조부였습니다. 어찌보면 아히도벨이 다윗의 책사로 섬기고 있었지만, 다윗이 행한 죄로 인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는 원한을 갖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반역하자 두 번 생각도 아니하고 바로 다윗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은 탁월한 지혜를 가진 자였지만 영적인 분별력은 약한 자였습니다. 그는 압살롬 편에 가담하여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 열을 대낮에 간음하도록 함으로 다윗의 가정을 무너트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어 다윗이 약한 틈을 타 공격하라는 모략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아닌 후새의 모략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히도벨은 나귀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 거기서 목을 매어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을 매기 보다는 회개하고 다윗에게로 돌아갔다면 그는 회복의 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자기의 계획이 실행되지 않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아히도벨은 철저하게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되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살았고, 자신의 뜻이 무산되자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히도벨이 자신이 섬기던 다윗을 배반한 결과로 고향에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히도벨을 축복하지 않으셨기에 그의 인생을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압살롬과 함께 하신것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 하셨기에 아히도벨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함으로 스스로 목을 매 생을 마감했습니다. 신명기 2123절은 “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가룟 유다와 아히도벨은 무죄한 피를 흘린 죄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끊음으로 죄가 가져오는 저주를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주님은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성전에 은 삼십을 던진 후에 스스로 목을 매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거둔 후에 이것은 피 값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값을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기에, 그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각지에서 절기에 예루살렘에 온 이후에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 나그네를 묻을 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그곳에 나그네들이 사망하면 묻어줄 묘지로 삼았습니다. 이와같이 가룟 유다의 생애는 비참하게 마쳤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자 생각을 한 후에 행동으로 옮긴 자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대제사장에게 은 삼십을 받고 파는 과감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의 양심은 그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습닏.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고자 하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무겁게 다가오는 무죄한 자에 대한 피를 자신의 목숨으로 갚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가룟 유다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는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지려는 모습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자신의 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회개한 후에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다시 회복하시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3.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지더라도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회복해야 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55:7).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생의 기초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믿음 까지도 흔들리고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넘어지기 쉬운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팔아 넘기는 죄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넘어질 때에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 베드로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이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돌아갈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입으로 주님을 부인했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는 행위를 미리 계획했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가룟 유다는 선을 넘어 주님을 십자가의 죽임에 넘겨주도록 사단과 공모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회복할 수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그 죄가 너무 깊어 스스로도 그 죄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거하면 경계를 넘어 죄의 길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과 부정의 경계에서 부정한 죄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회개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55:7).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공급하시며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열정에서 흔들림이 없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