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연구

여호수아 강해(3)-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수 2장)

비전의 사람 2022. 3. 2. 17:43

여호수아 강해(3)-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2)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돌아가 거기서 유숙하더니.”(2:1).

 

여호수아 1장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시고 약속의 땅에 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장은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탕꾼을 여리고로 보내며 정복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2:1).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사람을 여리고로 보내어 정탐하게 했습니다.

 

싯딤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의 신인 바알 브올에게 제사하며 음란을 행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더니.”(25:1). 이 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우상 숭배한 죄로 인하여 염병으로 이만 사천명이 죽게 됩니다. 이 곳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두 명을 보내었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에 이르는 첫 성읍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성읍으로 알려져 있고,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약 8 km 떨어진 곳입니다. 이 곳은 유대 광야에 속한 곳인데 이곳에 샘이 있어서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성읍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는 각 성이 나라를 이루는 도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엘리사 선지자가 쓴 물이 나는 곳에 소금을 넣어 단 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한 곳이고, 시드기야가 도망하다가 여리고에서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한 곳이고, 맹인 바디매오의 눈이 치료 받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23 km 에 이르고 있으며 그 길은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싯딤에서 여리고를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 당시는 3-4월에 해당하는 유월절 기간이었기에 우기에 해당했습니다. 우기 때는 물이 넘쳐서 쉽게 건널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40년 전에 홍해를 건넜듯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넌 후에는 여리고성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여리고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강한 요새였기에 자신들의 군대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요새였습니다. 비록 여리고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승리의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3).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여호수아는 구체적으로 정복할 성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은 정탐꾼이 바라본 여리고 성의 병력이나 군대보다는 정탐꾼이 만난 믿음의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믿음의 사람은 바로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라합의 믿음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라합의 믿음은 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돌아가 거기서 유숙하더니.”(2:1).

 

두 정탐꾼이 여리고에 이르러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했다고 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매춘부였습니다. 어찌보면 여리고에서 가장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몸을 팔아 살아야 했던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머물수 있었던 이유는, 라합의 집이 우리나라의 주막과 같이 술과 음식을 팔며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두 정탐꾼에 대한 소문이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 왔나이다.”(2:2). 그러자 왕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잡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두 사람을 미리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왕이 보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은 어두운 때에 성문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만일 빨리 따라가면 그들을 잡을 수 있다는 조언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보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라합에 대하여 믿음의 여인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에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멸망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11:31).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고 안전하게 숨겨주었습니다. 라합의 행위는 믿음의 행위였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야고보서는 행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믿음으로 그의 믿음이 온전케 되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2).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라합을 예로 들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5). 기생 라합이 사자를 영접하고 피할 길로 가도록 도운 것은 그녀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즉 라합의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그의 목숨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여리고를 멸망시키러 온 첩자를 숨겨준다는 것은 여리고성의 입장에서는 반역의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이 이스라엘에서 보낸 첩자를 살려보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여리고성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선택한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믿음을 가진 자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는 지혜를 얻게 합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그녀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에 라합과 그녀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능력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의 믿음은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했습니다. 라합의 후손 중에 보아스가 있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1:5-6). 보아스의 혈통 중에 다윗이 있었고, 다윗의 혈통 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여인들은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와 마리아였습니다. 라합과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특히 다말이나 라합, 그리고 밧세바는 경건하지 않은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이후로는 과거의 음란한 길에 다시 돌아가지 않고 경건한 여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2. 라합의 믿음은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라합의 믿음은 그녀의 고백에서 드러납니다. 그녀는 지붕에 올라가 두 정탐꾼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되고 말한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진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은 그녀의 마음에 간직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메아리였던 것입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9-11).

 

38년 전에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의 거민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렸지만, 실제로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두려워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리고는 전쟁도 하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앞에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 근처에도 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요단 저편의 강한 왕이었던 시혼과 옥에게 행하시고 그들을 전멸시킨 것을 들었기에 마음이 녹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움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신 줄을 알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듣자 마음이 녹으며 싸울 용기가 사라진 것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두려워 간담이 녹고 있을 때에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이와같이 믿음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마주한 라합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중에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순종이나 저항이냐 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었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여리고의 우상을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배경과 삶의 터전을 모두 포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리고의 우상은 거짓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미래는 이제 하나님의 손에 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 라합과 같이 우리가 의지했던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은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행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삶에서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에 대하여 칭찬할 때에 마음에 감추어진 믿음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거장들은 모두가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렸으며, 모세는 애굽의 영광보다 이스라엘과 고난 받기를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대적하여 승리했습니다. 나아만은 믿음으로 요단강에 일곱번 잠그는 순종으로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믿음도 입술로 고백하고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에 찾아온 정탐꾼을 숨겨줌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라합과 같은 선택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상황에서 우리는 항상 믿음의 선택을 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3. 라합의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2:18).

 

라합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한 후에 정탐꾼들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하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2:12-13). 그러자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자신들을 끝까지 지켜준다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주실 때에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라합은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 내리고 그들로 하여금 산으로 가서 사흘을 숨었다가 돌아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찾는 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정탐꾼은 라합에게 자신들을 달아내리운 창에 붉은 줄을 매게 하고 라합의 가족들이 그 집에 거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그의 부모와 형제 중에 그 집 문을 나서면 그들의 피에 대하여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라합은 그들을 보낸 후에 정탐꾼이 준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그 후에 두명의 정탐꾼들은 산에 사흘을 거하다가 요단 강을 건너 여호수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기에,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트리실 때에 라합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붉은 줄에서 우리는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연상하게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할 때에 구원받은 이유는 물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때에 인방과 물설주에 바른 피가 증거가 되어 그 집은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12:13). 이와같이 라합의 붉은 줄은 어린양의 붉은 피로 구원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로 붉은 줄과 십자가의 피와 연관시키는 것은 과도한 비유로 볼 수도 있지만, 피의 붉은 색에서 오는 이미지에서 구속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여 멸망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역사를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구원의 역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위대한 복음을 거절하는 자는 영원한 절망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것입니다.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고, 라합은 붉은 줄을 매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돌아온 두 명의 정탐꾼은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두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간담이 녹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이 라합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키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강팎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승리의 원천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사탄의 권세가 굴복되어지고 어두움의 권세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지금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