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1) - 성육신하신 하나님(요일 1:1-4).

비전의 사람 2022. 3. 19. 20:34

요한일서 강해(1) - 성육신하신 하나님(요일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중의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즈음에는 열두 제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었고,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다섯 권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요한 1,2,3서는 영생을 얻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시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기쁨이 풍성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3-4).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보여주며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일어날 미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생애 말기를 에베소에서 보내었고, 주후 80-85년 사이에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믿음의 2세대와 3세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핍박을 당하는 자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면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식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투하고 있었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확신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에 처하며 위기를 맞고 있을 때에 사도 요한은 그들의 믿음을 일깨워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요한일서를 네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첫째,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거짓 교리를 폭로하며 영적인 진리를 지키기를 권면했습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멀리하고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사랑으로 다가가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셋째, 사도 요한은 믿는 자의 교제가 풍성하도록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성도들이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지체와의 참된 교제에 대한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정에 비유하며 자녀들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넷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이 가득하기를 소망하며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1서의 1절에서 4절은 전체 서신의 서론입니다. 전체 서신의 서론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분 안에서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라는 말로 서신서를 시작합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생명의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묘사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은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태초에는 영원전 부터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사도 바울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자신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오감을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졌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1세기에 주목받던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철학에 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지주의 철학은 두 가지의 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첫째 영지주의는 구원의 길은 영적인 지식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어로 지식 또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gnosi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을 최고 신성에 대한 지식에서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지식을 깨달음에서 온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의 신비주의와 헬라 철학이 결합되어 나온 철학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지식을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영지주의는 모든 물질을 악하게 규정했습니다. 대신에 영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악하지만 영혼은 선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초대 교회에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의 철학을 가지고 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 철학에 기반한 그릇된 가르침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두 가지의 극단주의로 몰아갔습니다. 하나는 금욕주의였습니다. 금욕주의는 영은 선하지만, 몸에 속한 욕구를 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선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금욕주의에서는 고행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의 다른 극단적인 가르침은 방탕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아무런 문제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악하고 영은 선하기에 악한 몸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이지 몸은 그 자체가 악하기에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규범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마약을 할 수 있고 결혼 밖에서 성적인 관계를 맺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그 자체로 악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영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영지주의의 이단적인 사상으로 인하여 이단이 발생하고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적어도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이단적인 영지주의 가르침을 지적하며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 서신을 보내어 영지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바른 가르침에 굳게 서도록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영지주의가 교회에 침투하면서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100년 전에 진화론같은 철학이 신학과 교회에 침투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과학이나 이성을 더 높은 권위에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교회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며 자유주의 신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두 가지의 잘못된 가르침을 낳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가현설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가현설이란 헬라어로 ‘dokeo'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타나다라는 뜻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몸이 악하기에,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와 접촉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성육신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몸은 그 자체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몸을 입고 오셨다는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고는 인정하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는 육신의 몸을 입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몸이 아니라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육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과 악수하거나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가현설의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가르친 것입니.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잘못된 교리를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한다 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2서에서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7). 적그리스도나 거짓 교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자신은 직접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음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분의 몸은 우리와 같은 몸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두 번째 거짓은 게린투스(Cerinthians Gnosticism) 영지주의였습니다. 게린투스는 사도 요한과 동시의 사람으로서 물질은 악하기에 몸도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실제 몸을 가진 것을 인정했지만, 예수님을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했습니다. 게린투스 영지주의자들은 요셉은 예수님의 실제 아버지이고 마리아는 실제 어머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에게 임하셨고, 그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이 삼년간 공적인 사역을 하는 기간에만 함께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을 떠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게린투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와 같이 단지 사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죽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인간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심각한 교리적인 오류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거짓 교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일 4:2-3).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지주의는 이단 사상의 핵심으로서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신천지입니다. 이만희는 자신에게 예수의 영이 임하여 현재 시대의 예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이천년 전에 예수의 영이 예수에게서 떠난 후에 지금의 이만희 씨에게 임하여 그가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만희 전에는 문선명이나 안상홍이나 모두가 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이단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르치는 신비한 지식을 배움으로 구원받는 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의 진리대로 가르치지 않고 미혹하여 잘못된 교리로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지식을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 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1서를 시작하면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자신만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리나 다른 제자들도 함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환상으로 오셨다거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일시적으로 예수가 기름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때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만진 적이 있음을 강조하며 예수는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24:3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손과 발을 보이시고 제자들과 함께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에도 몸으로 부활하셨기에 생선을 드심으로 영의 부활이 아닌 육체의 부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 주님이 부활하셔서 오셨던 그 날에 주님을 보고 안으며 함께 기뻐했던 순간을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듣고 손으로 만졌다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인 이유는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 예수님이 그를 살리사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1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요일 1:2)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 생명이 우리의 눈에 보였다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성육신을 통하여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했고, 생명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요일 1: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영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그 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에 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았고 증거하였고 전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고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절도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전에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신성을 가지셨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독생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른 분인 것입니다. 즉 한분의 하나님 안에 세 분이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인격이십니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양태론이라는 이단 사상을 갖게 합니다. 이는 한분의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현현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아들이시기도 하며, 성령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12절에서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시며 은혜를 주신 이유는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생명의 영원한 기간을 의미할 뿐 아니라, 생명의 의미(qualith)에서 놀라운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은 자는 영원히 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 분의 가지가 되어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생명의 삶은 교제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3-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고 증거하고 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목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요한과 믿는 자들이 서로 교제가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귄다는 것은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제는 단지 식사하며 커피 타임을 갖는 것 이상입니다.

 

교제의 의미는 공통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즉 주님 안에서의 교제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가 공통적으로 나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우리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할 수 있는 영적인 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우정을 맺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믿음으로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나누며 사랑하며 섬기는 교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2:42).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안에서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며 말씀으로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제는 두 가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수평적인 교제는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수직적인 교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평안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와도 영적인 교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0-1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빛 가운데 거하면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교제하는 것은 서로 마음을 열고 말씀으로 서로 영적인 교통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공급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받아 새 힘을 얻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부담감으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흘러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요? 교제는 인생의 외로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는 우리의 영적인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우리가 혼자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하나님은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로움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지체들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 서로 교제함으로 영적인 풍성함을 누립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의 교제보다는 믿는 자와의 교제가 더욱 행복한 것은 우리의 교제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를 기록한 두 번째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4).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후에 하나님과 다른 지체들과 교제하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15:11).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는 참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교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