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연구

사사기(2) - 실패의 이유(삿 1:22-2:5).

비전의 사람 2022. 8. 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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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 - 실패의 이유(1:22-2:5).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2:2).

 

사사기는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수아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순종하였고 함께 협력해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함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승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문제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조금씩 세상과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산지의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1:19). 골짜기는 해변가의 근처에 있는 낮은 지역을 의미합니다. 즉 해변가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1:21).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실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의 타협이 큰 실패의 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승리의 길을 가는 중에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승리한 것 같으나 실패의 길을 열어 두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벧엘의 승리(1:22-26)

 

사사기 122절에는 요셉 족속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 족속은 벧엘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벧엘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요셉 족속은 벧엘을 정복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성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성읍의 입구를 보여주면 그를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보여주자, 요셉 족속은 벧엘을 쳐서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성읍의 입구를 보여준 사람과 가족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헷 사람의 땅에 갑니다. 헷 사람의 땅은 오늘날 시리아나 튀르키에 지역일 수 있습니다. 그는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불렀습니다. 벧엘의 원래 이름이 루스였던 것입니다. 그는 벧엘을 떠난 이후에 헷 사람의 땅에 가서 다른 가나안 성읍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 족속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통하여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사람들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람을 살려줌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헷 사람의 땅에 가서 다른 루스라는 성을 세워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옮겨간 것을 보게 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함으로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살아갔지만, 벧엘의 그 사람은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루스라는 성을 세우고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를 정착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의 승리는 참된 승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2. 실패하는 이스라엘의 모습(1:27-36)

 

1장의 마지막 구절은 므낫세(27)와 단(34) 지파와 같이 북쪽 지파의 정복 전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그 땅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자,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습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엿더니.”(1:27). 므낫세 자손이 벧엘에서 타협한 이후로 계속해서 북쪽으로 올라가 정복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므깃도와 같은 거미들을 쫓아내지 못하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결심하고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강성하게 된 후에는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28). 이스라엘 자손은 강성하게 되면 주위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부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27, 29. 30,32). 에브라함이 계셀에 거한 간ᄋᆞᆫ 살마아ᅟᅳᆯ 좇아내지 못하자,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론 거민을 좇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다고 햇습니다. 아셀도 가나안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자, 가나안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납달리 지파도 그들 가운데 거하는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결심하고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거주했습니다(33). 그러던 중에 아모리 사람은 단 사람을 산지로 쫓아내면서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34).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시작하자,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노역을 하였으나 아모리 족속은 점점 힘이 강성해 지면서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내기 까지 했습니다.

 

벧엘에서 승리로 시작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점점 가나안 사람들과 대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면, 그들이 분명히 승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사람들을 쫒아내지 않았습니다. 므낫세 지파(27), 에브라임(29), 스불론 (30), 아셀 (31), 납달리 (33) 지파 들이 모두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쫓아내지 않은 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유다 지파도 골짜기의 거민들이 가진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가나안 사람들이 소유한 철병거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해변가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이 소유한 철병거를 두려워 했던 것은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 자손은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점점 타협하기 시작했고 점점 약해지면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문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3. 심판의 날(2:1-5).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던 사자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2:1).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현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 하기 전에 하나님의 메신저로 활동하신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보김은 울다(WEEP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벧엘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원래는 보김이 아닌데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을 듣고 그 곳을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땅을 주실 것을 약속했던 장소입니다(28:10-19). 요셉 족속이 벧엘에서 승리했기에 기쁨의 장소가 되어야 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통곡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통곡했던 이유는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책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언약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어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2:1-2). 언약은 지켜야 할 굳건한 맹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약속을 지키심으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길은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지 않는 것이며, 그들이 세운 단을 헐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2:2).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과 가나안 사람과 동시에 언약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께 불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언약을 맺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벧엘에서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들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들과 타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벧엘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벧엘 사람에게 선대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헤세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 사람을 향하여 그들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타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는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2)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셨던 질문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죄가 큰 결과를 가져왔듯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는 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을 위하여 쫓아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2:3).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사람들과 맺은 언약은 가나안 사람의 생활과 종교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사기의 역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사람들과 맺은 언약의 결과로 가져오는 우상 숭배 등과 같은 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쓴 결과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시가 되며, 그들의 우상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과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통곡의 장소인 보김이 되었습니다. 통곡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보김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제사 보다도 순종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제사가 순종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4. 교훈

 

우리가 이스라엘에게서 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협으로 인하여 천천히 찾아오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는 것이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원주의입니다. 다양한 종교와 세속적인 문화, 부도덕한 삶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죄와 타협하는 것은 사탄을 동역자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즉 죄와 사망과 언약을 맺어 영적 파산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영적인 권세를 잃어버리고 패배의 길로 가기 시작합니다. 요한 계시록이 일곱 교회는 순식간에 변질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에베소 교회는 한 순간에 첫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성도들을 미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2:20).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순결한 믿음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는 미지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토하여 내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열심히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변질은 처음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세상과 타협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처음부터 믿음에서 타협한 것이 아니라 작게 보이는 부분에서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큰 변질을 가져온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상은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와 불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세상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2:15). 포도원을 무너트리는 작은 여우를 잡지 않으면 포도 농사가 망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삶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있다면, 그것을 찾아 보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나안과 타협하게 하는 작은 여우가 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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