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믿음

비전의 사람 2022. 9. 7. 17:08
반응형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믿음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5).

 

아담 이후에 족보가 두 가지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가인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셋의 족보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 범죄 이후에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던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4:16).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떠나는 것피하거나’ ‘달아나다의 의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가인의 후손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자녀로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에노스 였습니다. 성경은 비로서 사람들이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갔지만, 셋의 후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데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과 소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을 예배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셋의 육대손이 바로 에녹이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서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혈통을 지켜갔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며, 그 분과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 에녹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에녹을 천국으로 부르셔서 그 분의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나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4).

 

동행이란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영적으로 방황하는 세상에서, 에녹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며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에녹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누군가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 두 번 함께 길을 걸으며 동행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함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마음이 서로 맞아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3:3) 라고 했습니다. 서로 뜻이 같아야 함께 길을 걸어가며 동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뜻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뜻을 달리했습니다. 그들은 가인의 길을 따라 가기로 선택하고 어두움의 왕인 사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성취를 찬양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킵니다.

 

에녹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가인의 후손들과 같이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도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유혹에서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릴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의 삶이란 단지 제사를 드리는 의식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뜻에 삶의 초점을 맞추기로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에녹의 뜻에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했기에 에녹은 하나님과 삼백년간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간 동행했던 비결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아벨의 예배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벨의 예배에서 더욱 성숙하여 에녹의 동행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과 삶을 함께 했던 에녹의 지혜는 영적인 성숙의 모습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에녹이었기에 가인의 길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존재를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게 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얼마나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지, 하나님이 에녹을 죽음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던 에녹에게 하나님은 천국에서 충만함으로 보여주시고 그에게 믿음의 보상으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시작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님도 사랑하며 순종합니다. 하물며 우리를 영원한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마음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탐심과 우상이 있다면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이 스스로 성을 쌓고 그 후손들이 스스로의 성취를 통해서 자아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가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것에 만족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식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함으로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날마다 기도와 말씀의 묵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두운 일에 동참하지 않고 빛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향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에녹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지켰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셨다면 육백 년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변하지 않는 신실한 마음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진실성은 오랜 기간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게 됩니다. 가짜 보석과 같은 이미테이션은 처음에는 화려한 보석처럼 빛이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빛이 바래면서 가짜임을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미테이션은 가격이 싸구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보석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아름다움이 빛나게 되며 진흙에 빠져 있더라도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모조품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왔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거짓되고 악한 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진실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동행하였기에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세상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마음이 지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에녹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흔들림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으로 기도하였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잔을 마시면서도 믿음과 순종의 신실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사도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의 신실함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에녹이나 사도 바울과 같이 마지막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믿음의 신실함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믿음의 여정을 함께 하다가 인간적인 욕심을 갖게 되면서 결별하게 됩니다. 그가 아브라함과 동행하였다면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으며 두 딸로 혈통을 잊는 비극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포기하고 소돔성이 주는 타락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와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그가 왕이 되어 탁월한 지혜를 얻었지만, 인생의 말년에 쾌락에 빠지면서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후궁으로 맞이하게 되고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하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사울 왕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하게 왕의 위치에 오르게 되지만, 결국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서 결국은 파멸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신실함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에녹은 노아와 같이 술에 취하여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까지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랑이 세상적인 지위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순간 감정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주님이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이어야 합니다.

 

저의 교회가 지난 42년 간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이유는 환난과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믿음을 지키는 귀한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앞으로 이와 같이 신실하게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잘했다고 칭찬받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에녹은 하나님이 주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5:22-23).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게 됨으로 가장 장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장수한 배경이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뜻은 창 던지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족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게 될 때에 혼자 남아서 마을을 지키는 자가 창을 던지는 자였습니다. 그가 죽으면 마을도 함락되는 것이며 멸망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 마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던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의 뜻대로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므두셀라를 생각할 때에 창던지는 자를 생각했으며,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므두셀라를 오랫 동안 살게 하심으로 구백 육십 구살을 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미루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온 땅에 홍수로 심판하신 해이기 때문입니다.

 

에녹에게는 므두셀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였습니다. 므두셀라는 창을 던지는 자로서 마을을 지키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 마을이 멸망하듯이, 므두셀라가 죽는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아 당시의 그 시대는 죄가 관영한 시대였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 외에는 누구도 그 경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유다서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14-16).

 

에녹은 경건하게 행하지 않은 일과 그들의 완악한 말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에녹이 책망했던 사람들은 원망이 많았고 불만을 토하며 자신의 정욕대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 입으로는 교만하여 자신의 자랑과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에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므두셀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에녹은 세상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에녹은 세상을 향한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줄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16). 오늘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주는 메시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에녹과 같이 세상의 부도덕한 행실과 주님을 거역하는 말에 대하여 책망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상에서 부패하게 합니다. 세상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교육인 인본주의로 자녀들의 믿음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대를 향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세상과 선을 그을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책망하고 회개하게 하는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므두셀라가 죽고 난 후에 노아 시대의 홍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온 세상이 멸망하게 됩니다. 에녹은 이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하기전에 휴거를 통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부르시는 대상이 바로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에녹이 영적으로 어둡고 혼탁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의 때가 가까운 이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경건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