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거룩한 교회를 세워라(4) -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

비전의 사람 2022. 10. 2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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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회를 세워라(4) -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인 영생을 복음을 믿고 거듭난 성도에게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영혼들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지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교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영적인 삶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에는 일곱 가지의 기구가 있었습니다. 그 기구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성막에 들어오게 되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은 바로 놋제단이었습니다. 놋제단을 번제단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매일 하루에 아침 저녁에 두 번씩 하나님께 번제의 희생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번제단에 대하여 출애굽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27:1-2).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놋을 입혔습니다. 그 크기는 높이는 1.5m, 가로 세로는 2.5m 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단의 네 모퉁이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놋제단에는 놋그물과 놋고리, 고리에 끼는 채가 부착되었습니다. 놋제단에서 타는 숯불을 담아 성소의 분향단이나 등잔대에 불을 피우도록 불을 옮기는 화로도 만들었습니다.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화제 즉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에서 피는 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불이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에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9:24). 하나님으로부터 온 불이 번제단의 번제물과 기름을 태우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은 놀라서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불이 제단에서 절대로 꺼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단 위의 불은 항상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6:12-13).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이 꺼지지 않게 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려야 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 저는 번제단의 의미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재단이라는 말은 영어로 altar 로서 희생물, 제물(sacrifece), 또는 도축(slaughter)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단은 희생 제물의 장소 (a place of sacrifice)라는 뜻입니다. 성막에서 단은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번제단(burnt altar)이고, 다른 하나는 분향단(incense altar)이었습니다.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단을 세워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가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 단을 쌓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8:21). 노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정결한 짐승과 새를 추ㅟ하여 번제도 단에 드렸습니다. 단에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이르러 단을 쌓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8).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은 것은, 그 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성막의 뜰을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곳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번제단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로 인하여 대신 죽어가는 희생 제물이 피흘려 죽어가고 불에 태워지는 곳이었습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희생 제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1:3).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황소를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성막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는 황소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안수합니다. 이는 자신의 죄가 소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죄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하시고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황소를 도축하여 그 피를 번제단에 뿌리고,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 후에 번제단에 올려 전부를 불에 태웠습니다. 소는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를 대신하여 그 죄의 짐을 지고 피흘려 죽어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성막에서의 번제단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번제단에서 피흘려 죽은 소와 같은 희생 제물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피흘려 죽은 희생 제물과 뿌려진 피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속죄함을 받아 구원에 이를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피흘려 죽은 모든 희생 제물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범한 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길로 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천사가 타락하여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마귀가 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회복하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고전 15: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2.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의 길을 보여줍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풍성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세우신 이유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는 첫 번째 길을 보여주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번제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제사장을 통하여 번제단에서 희생물을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드린 희생 제물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자손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희생 제물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1:3).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드리는 것으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구원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온전한 헌신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살아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구별하고 헌신하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자손은 소제를 드렸습니다. 소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로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2:1). 소제의 제물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추수한 곡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곡물이나 첫 이삭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주로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와 같은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추수를 마치거나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곡물의 제물을 드려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에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7)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행실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면 삶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사하는 자는 불평하는 자보다 더욱 은혜로 풍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는 여유가 있고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복음의 수고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구속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필요를 위하서 사랑의 헌금을 모아 전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전해준 사랑의 헌금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4:18).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과 사도 바울의 희생적인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물질을 모아 전달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과 제물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스라엘 자손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3:1).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희생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서원이나 감사,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화목제를 드릴 때에 기름과 콩팥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자신들이 성막의 뜰에서 음식을 먹으며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화목하는 관계의 모습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화목하는 삶은 지체들과도 화목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삶은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며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지체들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2:14)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화평하게 하고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화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넷째, 이스라엘 자손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부지중에 범한 죄에 대하여 속죄의 희생을 드려 씻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4:24).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가 발견되면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 피로서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제였습니다. 번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단번에 얻는 구원을 상징한다면, 속죄제나 속건제는 우리의 삶에서 범하는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의미를 닮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 즉 교제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그 안에 어두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안에 어두움이 없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드러나는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계속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의 삶을 통하여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성막에 가서 번제단에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의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러한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제의 삶을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속죄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의 복음은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번제단의 사각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27:2). 뿔은 능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번제단 사각의 뿔은 십자가의 능력을 상징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해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하고 나누며 선포할 때에 능력있는 교회로 세워지게 됩니다. 교회가 능력이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나요? 그것은 정치나 사회, 문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때에 복음의 능력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오순절에 삼천명이 구원받고 교회에 더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초대 교회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수가 늘어나자 교회는 더욱 능력있는 교회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해지기 시작했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처럼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될 되에 교회는 더욱 강해지고 능력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더욱 복음을 사랑하고 나누며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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