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거룩한 교회를 세워라(10) -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라

비전의 사람 2022. 12.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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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회를 세워라(10) -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9-20).

 

우리는 성막을 통하여 영적 생활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거룩한 교회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막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입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번제단에서는 동물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로 인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는 물두멍에서 물로 손과 발을 씻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성소에는 세 가지의 기구가 있습니다. 진설병을 놓는 상과 등잔대, 그리고 분향단입니다. 이곳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지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구원받은 이후에 교회에 소속되어 함께 세워갈 때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가 있고 임재가 있는 지성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홀로 들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죄를 속죄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가운데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홀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세 단계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체들과 연합하여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의 영적 생활은 교회와 함께 하는 사역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홀로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교제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평생에 소망했던 것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28:4).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보기를 소망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영적으로 새 힘을 얻어 삶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지성소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9-20).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새로운 길을 내셔서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출애굽기의 성막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이라는 유대인의 절기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속죄소라고 하는 곳에 피를 뿌려서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속죄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씻기 위하여 대제사장이 황소의 피를 뿌리는 곳이었습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25:17). 속죄소는 죄를 속죄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속죄소는 별도의 기구라 아니라 언약궤를 덮는 기구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곳에 황소와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 자신과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받게 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하여 누그러지고 이스라엘과 화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하신 이유는 그 피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실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3:25).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휘장이 갈라짐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갔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9-20).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2. 지성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2).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우선 순위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과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언약궤와 속죄소는 하나의 기구였습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쌌습니다. 그리고 속죄를 만들어 언약궤 위에 두어 덮개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속죄소에는 천사를 상징하는 그룹의 형상을 만들어 속죄소 두 끝에 두어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개 했습니다. “그룹들은 두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25:20). 그룹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로서 두 날개를 펴서 얼굴을 서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가운데 주님을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2).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보좌를 지성소의 언약궤로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서 언약궤 위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그 분을 경배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께 나아갈 때에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또한 삶의 왕으로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마다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그 분의 뜻에 순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가 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44:4)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분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시며 동시에 왕께 순복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영광의 왕이라고 찬송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리로다.”(24:9-10). 하나님은 영광의 왕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을 경배할 뿐 아니라 그 분의 임재 가운데서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무엘이 어린 시절 성소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지만 그는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그에게로 갔습니다. 이때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답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들은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분의 말씀으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 분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받기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성숙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숙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6:38-3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고난을 견디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분의 순종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 구원의 길이 열렸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즉시 천국으로 가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헌신된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며 헌신된 성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헌신된 종이 되기 위하여 제자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제자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복종하며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때에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는 삶은 주님의 영광이 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3.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아래 거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보좌는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위에 좌정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에는 세 가지의 물품이 있었습니다.

 

언약궤에 놓여 있던 물품들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 둘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였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의로운 행실이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통하여 일하시는 영적인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죄소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신의 허물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6:6)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허물을 보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6: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자신의 허물을 보며 자신의 부정한 입술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선지자로 부르시고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가운데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55:7)고 외쳤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되 자신의 불의한 생각과 길을 버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로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보좌인 속죄소 위에 임재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허물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인 것입니다.

 

언약궤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불순종하고 영적인 권위에 도전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영적인 지도자로 택하셨음을 보이시기 위하여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평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적으로 인도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만나가 든 항아리도 있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만나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겠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의 필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재정적인 필요도 있고 영적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필요는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에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 같은 새로운 힘을 주심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날마다 앙망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62: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사모함으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의 영광이 우리의 영혼에 충만하여 날마다 새롭게 되어 피곤치 아니하고 달려가는 자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지성소에서 섬기는 천사인 그룹을 볼 수 있고, 언약궤에 있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를 봅니다. 이는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속죄소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성령으로 인하여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주님을 날마다 바라봄으로 인하여 담대함을 얻으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누리가 작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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