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복있는 자가 누리는 행복(시편 1편)

비전의 사람 2024. 2. 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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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자가 누리는 행복(시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1-2).

 

복 있는 자를 생각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는가요?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인 금수저로 태어나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이재용 삼성 그룹 부회장을 떠오르는가요? 아니면 한국 축구에서 가장 공헌을 많이 하고 존경받는 손흥민 선수를 생각하시나요? 또는 정치에서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오른 윤석열 대통령을 생각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있는 자가 누리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복있는 자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복은 다른 사람에게나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비관하며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오늘 우리는 복 있는 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쉬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행복, 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복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명기 33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를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33:29).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아쉬레로서 복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행복과 복은 같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멀리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1:1).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을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자입니다. 그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인생의 여정에서 함께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악인과 죄인, 오만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이라 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죄받아 마땅한 죄를 짓습니다. 그러한 악한 사람의 조언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 불행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르치는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죄인의 길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찾는 죄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들이 가는 길을 따라서 탕자와 같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받고 구원받은 자는 이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이 어떠한지를 구별할 수 있기에 그는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며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말과 태도를 보이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이러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와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와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배움이 있을지라도 삶에서 실천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지혜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2024년 아시안 축구에서 한국이 한수 아래인 요르단에게 형편없이 게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영국에서 기사가 나왔는데, 그 기사가 한국 국민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강인 선수가 주장인 손흥민 선수와 다툼이 일어났고 주먹질까지 한 하극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특히 이강인 선수는 손흥민 선수보다 9살 아래의 선수였기에 국민들이 느끼는 분노가 더욱 컸습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분노하며 이강인 선수의 국대 자격을 박탈하고 군대도 보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강인을 모델로 기용했던 광고 회사들은 회사 광고에서 이강인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진 한 장이 소개되어 국민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일명 탁구 게이트인데 손흥민 선수와 다툼이 있은 후에 운동장에서 함께 장난쳤던 어린 선수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오만한 자리의 함께 앉은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주장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고도 아무런 반성없이 웃고 장난치는 모습에서 오만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잠언서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1:1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엎드렸다가 죄 없는 자의 피를 흘리는 일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들의 꾀에 빠지면 삶이 전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녀가 유혹할 때에 그에게서 멀리하고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음녀의 유혹에 빠지는 길은 사망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로 얻지 못하느니라.”(2:19). 음녀의 길로 가는 것은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고 했습니다.

 

아합왕이 이방인이었던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 나봇의 포도원을 얻기 위하여 무죄한 나봇의 피를 흘린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로 아합왕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자신의 피를 흘려야 했고 그들의 악한 죄는 개가 와서 그들의 피를 핥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있던 데릴라의 유혹에 빠져서 거룩을 잃어버렸고 결국은 자신의 힘을 잃고 블레셋의 도시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사람과 함께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2.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2).

 

시편 기자는 행복한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시편을 기록할 당시는 모세 오경의 말씀이었고, 지금은 성경 전체 66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위대함을 알수록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2:21).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말씀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4:12). 말씀은 살아있기에 우리의 생명력을 회복하여 새 힘을 얻게 하고 삶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 꿀보다 달게 하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19:7-8).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영혼이 소성케 되고 말씀으로 인하여 지혜를 얻으며, 말씀으로 인하여 마음이 기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인하여 눈이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 영적인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119:9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의 명철이 노인보다 뛰어나고,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평안이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발에 등이며 길에 빛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씀을 묵상하는 즐거움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기에 꿀보다 더 달아 마음에 즐거움이 넘치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다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읊조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며 입으로는 소리내어 읽는 것입니다. 묵상하다라는 말은 그냥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작은 소리를 내며 읊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기에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러기에 그 율법을 낮과 밤으로 시간을 내어 묵상하며 마음에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는 만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에 대하여 신명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8:3). 우리에게는 육의 필요를 위해서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영의 필요를 위해서 거룩한 말씀을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왕은 그 말씀을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했듯이, 우리도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가 더욱 영적으로 자라가며 순결해지며,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행복한 사람은 말씀의 능력으로 형통하게 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1:3).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는 그의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이 가르치는 핵심은 그리스도인이 형통하게 되는 비결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다 지역은 광야가 있어서 나무나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엔게디 광야 같은 곳에도 물이 흐르는 시냇물 주위에는 나무가 자라서 시절을 따라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과실을 맺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생존하고 자라가며 열매를 맺는 비결이 시냇가에 흐르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이 찾아와도 공급되는 물이 있기에 생존하여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형통의 의미는 돈이나 재물, 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통의 의미는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형통은 시련과 역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뛰어나게 되고, 그 뛰어남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무의 열매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열매를 맺힙니다. 열매를 그냥 나무 위에 두게 되면, 그 열매는 썩어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게 되면, 그 열매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고 격려를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통하도록 마르지 않는 시냇물을 보내주십니다. 그 시냇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거듭나는 구원의 은혜가 없이는 형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않는 자에게는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가치대로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되면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영적인 생명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이 흐르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부요함을 누립니다. 그리고 말씀이 주는 양식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서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키기에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마르지 않는 강물이 될 때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시험이 찾아올 때에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낙심할 때에 기쁨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시는 마르지 않는 시냇물로부터 날마다 공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이 고난과 시험에서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119:92)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이 주는 극심한 고난을 이기고, 광야의 험난한 환경을 이기고,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에서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다윗에게 삶의 길이 되엇고 빛이 되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의 체질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고, 그 결과로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였기에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겸손하여 관계에서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고난에서 승리하는 형통을 누렸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주는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함을 얻어 승리함으로 형통의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이나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을 의지하는 삶은 우리가 형통하는 삶을 누리게 되는 비결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28: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즐거워하고 지켜 행하는 자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뛰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형통케 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십니다. 형통의 목적은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난 이천년간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뛰어난 민족으로 존재했고, 그들의 강력한 정체성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건국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권력이나 군사력, 영토를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뛰어난 지성이 있었느데 그것은 바로 율법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세 시간은 기록된 율법을 배우고, 세 시간은 구전 율법을 배우면서, 그 율법을 삶에 적용시키기 위한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라와 영토가 없는 불행한 상황에서 수많은 핍박을 받으며 생존해야 했지만, 그들의 힘은 막강하여 군주를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금융계에 세계적인 힘을 얻어 지금까지 세계를 움직이는 파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전체 수상자의 27%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적 천재인 콜롬버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현대사에서 유대인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내 주요 대기업들의 CEO와 재계, 금융계의 주요 경영진들,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하여 실질적으로 미국을 장악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유대인들은 미국을 통해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랍권 적대 국가들로 둘러쌓인 중동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조그만 영토의 나라가 지금까지 건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은 세계 100대 기업의 40%를 소유하고 있으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65%를 배출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낮은 나라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화목한 가정환경과 세계 인구의 0.2% 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금융계, 문화계, 과학계 등 많은 분야에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우수한 사람들을 배출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악인들은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멸망할 것입ㄴ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아시고 그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을 향하여 형통의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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