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고통의 십자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시편 22편)

비전의 사람 2024. 3. 2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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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십자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시편 2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고통의 순간을 표현할 때에 우리에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눈물, 전쟁이나 지진과 같은 재난을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가장 알려진 이미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형벌이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럽기에 로마 시민에게는 내리지 않는 형벌이었습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기록한 시입니다. 그 시편에는 자신의 경험하는 고통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적인 시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중심을 이룹니다. 그 중에서 시편 22편에 대하여 스펄전 목사님은 십자가의 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할 때에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의 성취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전에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음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다윗은 사울로부터 도망하는 순간에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 죄가 없었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는 동굴에서 숨어 지내야 할 때도 있었고 광야의 거친 들에서 지내며 추운 밤과 더운 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의 순간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유혹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22:2)라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고통에 대한 하소연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는 예언인 것입니다. 시편 22편의 1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운명하실 때에 시편 221절의 말씀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46절에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6). 주님께서는 운명하실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십자가에서 당하신 절망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는 완전하 사람이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당하시는 고통은 우리가 느끼고 당하는 고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고통이 찾아오면 다윗과 같이 절망하며 고통하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거나,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파산하게 되거나,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을 하는 순간들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거지?” 다윗도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22:2)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지만, 고난의 시간에는 자신이 낮과 밤으로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계에서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람을 따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치유하기도 어려운 고통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며 조롱당하실 때에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고난에서도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아무런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주님께서는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외침을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에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실 때에 외면하시고 버리셨나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린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셔서 죽도록 내버려두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우리를 다른 피조물보다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저주아래서 고통당하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운명에 처한 인류를 향하여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3: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아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고난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앞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순교의 현장에서나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이겨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복음 선포와 그 분의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기도 하고 고난의 아름을 겪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보여주신 본에 대하여 ...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찾아오지만 주님이 고난 중에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몸은 채찍질에 살이 떨어져 나가 피를 흘리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독생자이시고 인자와 진리가 충만하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실 때에는 사람보다 못한 벌레와도 같은 취급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이 하찮은 벌레를 함부로 대하고 발로 밟아 죽이는 모습에서 우리의 주님은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주님은 사람보다 못한 벌레와도 같은 대우를 사람들로부터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로 인하여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섬기시고 대신 죄의 짐을 지시기 위하여 죄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의 최후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와 같이 영원한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웃으며 조롱했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22:7-8).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께서 아들이면 구원하실 것이라는 조롱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한 장면을 마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이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27:39-40).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에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신 것은,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에 이르신 것입니다.

 

지나가던 자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같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희롱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27:41-43).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남은 구원하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 자라고 회롱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에 눈먼 자를 뜨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고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자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믿음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예수를 기뻐하시면 구원하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것은 사탄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사역의 현장에서 이러한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다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 십자가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을 섬기면서 찾아오는 상처와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을 섬기면서 찾아오는 낙심과 피곤함, 패배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이 찾아오면 우리의 내면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 소리는 주위에서 말하는 음성이 아니라, 나의 낙심된 마음에서 찾아오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자아에서 내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소리는 사탄이 주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낙심되고 피곤하고 지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로마 군인들의 조롱은 마태복음 2728-31절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28-31).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한 후에 십자가에서 처형하기 전에 쇠나 뼈조각이 박힌 가죽 채찍으로 채찍질 했습니다. 채찍질에 뼈나 쇠가 있었기에 온 몸의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22:17)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뼈가 드러난 것을 예수님은 목격하며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다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에 많은 악한 자들이 주님을 에워싸 조롱하며 고통에 고통을 더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22:11-13). 예수님의 주위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 유대인들과 이방인,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모두 연합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가장 잔인하게 모욕하고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힘센 황소와 같고 바산의 힘센 소들이나 입을 벌려 부르짖는 사자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바산은 갈리리 바다의 오른쪽에 있는 초원으로 소들을 방목하여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자라는 소는 힘이 세기로 알려졌기에 바사의 힘센 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당하신 후에 로마 군인들 손에 넘겨지신 후에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이제 온 몸의 힘이 빠지고 피가 흐르고 뼈가 어그러진 가운데서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나 사자와 같이 위협하고 협박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고통에 대하여 다윗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노에 두셨나이다.”(23:14-15). 물이 땅에 부어지듯이, 예수님은 물 같이 자신을 온전히 희생 제물로 쏟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에 전재의 재물은 포도주를 제물에 붇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관제로 부음바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뼈가 어그러지고 마음이 촛밀 같아서 속에서 녹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발과 손에 박힌 못으로 몸이 지탱되는 고통에서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모든 뼈가 어그러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큰 고통으로 인하여 마음이 촛밀같이 녹아지셨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에 젖은 기도를 하셨다면, 십자가에서는 피를 흘리시며 마음이 촛밀같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유다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십자가의 고통에서 녹아내렸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죄의 진노의 형벌로 다루실 때에 그 고통에서 마음이 녹아내리는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질그릇이 뜨거운 불에서 구워서 나올 때에 그 안에 모든 수분이 증발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하여 모든 힘이 말라 더 이상 어떠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가 잇틀에 붙어있을 정도로 모든 기력이 다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하여 모든 몸의 성분이 녹아내려서 사망에 이르는 티끌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손과 발을 못으로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쩔렀나이다.”(23:16). 시편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22:17-18)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갖고, 속옷은 통으로 짜였기에 나누지 않고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갖기로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모습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19:23-24). 당시의 유대인들의 복장은 머리에 쓰는 두건과 겉옷과 속옷, 허리띠와 신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네 명의 군인들이 그의 옷을 한 깃씩 취했다는 것은 군사들이 각각 한 개씩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옷은 통으로 되었기에 나뉠 수가 없어서 제비 뽑아 한 사람이 취했습니다. 이는 시편 말씀과 같이 겉옷은 나뉘지만 속옷은 제비 뽑을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셔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 당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우리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신 희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미래에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만, 주님이 당하신 고난만큼은 당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어떻게 도움을 주실 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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