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영적 회복의 길 (말라기)

비전의 사람 2019. 1. 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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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회복의 길 (말라기)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엑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1:1-2).

 

말라기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말씀하신 후에 400 년간 침묵하시는 기간을 갖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사역했던 기간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시기는 3차례 있었습니다. 1차는 스룹바벨을 통하여 기원전 537-8 년이었고, 2차 귀환은 에스라를 통하여 기원전 458년이었습니다. 그리고, 3차 귀환은 느헤미야를 통하여 기원전 444 년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유대 사람들과 성벽을 재건 한 이후의 기간이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스룹바벨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되고,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말씀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재건하면서 외적인 회복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기간에 이스라엘은 다시 세상의 길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보니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는 자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성전에 제사장이 아닌 자인 도비야가 방을 갖추고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 대한 필요를 채우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장사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솔로몬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책망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였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영적 회복을 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말라기서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 (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1:2-3)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초라해 보였고, 농사를 지었지만 흉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원망이 가득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요? 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낙심하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는 음성이 마음에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비교하면서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12 지파를 통하여 형성된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차자인 야곱을 택하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권을 팥한그릇에 팔면서 장자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을 쫓다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놓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은 에돔입니다. 에돔은 현재 페트라라고 하는 세일산 주위에서 거처를 정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바욧의 후손인 나바티안 족을 보내셔서 에돔을 몰아내십니다. 에돔은 유다의 남쪽 지역인 이두메 지역으로 옮기게 되고, 이두메 지역에서 에돔의 후손이 헤롯 대왕이 나오게 됩니다.

 

에돔은 다시 무너진 곳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를 무너트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향하여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요.’ (1:4)라고 하셨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나라가 멸망하고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영영히 그 나라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시지만, 그들이 포로 생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의 피는 섞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사마리아와 헤브론과 같은 지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왕국인 다윗의 혈통을 가진 유다는 다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 나라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진행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 3:1).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6).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영적인 나태함을 책망하십니다. 아들은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향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master)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두려워함은 존중(respect) 을 의미합니다. , 나를 존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라며 답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단에 더러운 떡을 가져다가 드리면서, 하나님께는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는가라고 자신들의 행위를 부인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최선의 것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첫 열매를 드려야 하며, 병들거나 흠이 없는 짐승으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1:3).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흠 있는 것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2:20). 그러나,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이 흠있는 것들, , 눈 먼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심지어는 도적질 한 것으로도 드렸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상은 더러워졌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으로 너희 총독에게 가져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 총독이라도 그것을 기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헛되이 제물이 불사르지 않도록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의 책망은 이어집니다.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2:11).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결혼을 함으로 그 우상을 이스라엘에 가져오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이혼하는 일들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의 풍속과 가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흡수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경건한 자녀를 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하나님께로 마음이 향하지 않은 모습에서 하나님은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씀앞에 자신을 살피고 있는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세상의 우상을 마음으로 품고 사랑하고 있는지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 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1-2).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의 가치와 풍속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날마다 자신을 말씀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 쓰임받도록 하는 삶이 참된 예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 (2:17).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악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기에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며 반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는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자로서 보내심을 입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엘리야의 심정으로 사역한 자가 침례 요한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사자인 메시야가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에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위해서 오신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오시는 주님은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임하는 날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메시야 되신 주의 사자는 사람들의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3:5).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러 오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악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악한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의 의로운 피가 흘려지고 있고 억울한 일에 대하여 올바른 보상을 받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기억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 ...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3: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3:8-9). 하나님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나의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큰 도전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 이전에 믿음의 사람들이 드린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됩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4:20). 그 후에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서원하게 됩니다. 야곱은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28:22)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며, 그 믿음의 증거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11:42). 예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만족한 나머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행하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3:10).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드리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넘치도록 축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일조, 즉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 위한 통로로 만드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소중함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악한 말로 주를 대적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완악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악한 말로 대적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3:14-15).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고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형통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주님을 섬기다가 혹 시험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가?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번영하고 교만한 자들이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을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3: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섬김이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들을 아끼며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3:17-18). 하나님은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악인과 의인을 분별할 때 함께 분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가 헛되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소중히 여기시며 그들과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순간에 힘들고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며 그들을 위한 상급을 예비하십니다. 우리의 섬김의 유익은 주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주님의 때에 우리에게 큰 상급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극렬한 풀무불 같이 임하셔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불타는 나무가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않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한 강한 불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함으로 송아지 같이 뛰는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뜻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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