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탐구

성경으로의 여행(25) - 거룩한 삶의 실천(레 17-27장)

비전의 사람 2019. 11. 12. 13:29
반응형

성경으로의 여행(25) - 거룩한 삶의 실천(17-2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20:7).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 분의 백성이 자신을 깨끗게 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하는 동기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레위기 1-16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면, 레위기 17-27장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거룩함을 선포하셨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거룩한 곳에 거하시며 자신을 깨끗케 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예배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산산수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6:48)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가 온전해야 하신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도전을 주신 것이다. 거룩은 흠이 없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베드로전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라고 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닮아야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거룩이란 예배의 의식을 넘어 삶의 모습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레위기 11-15장은 정결과 부정한 음식, 출산후 산모의 정결 기간, 피부병에서의 정결과 부정을 설명하고 있다.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의 속죄와 번제를 통하여 죄에서 속죄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길을 보여준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16:30). 이스라엘이 속죄일에 뿌려진 피로 정결하게 되었다. 레위기 17장에서 27장은 이스라엘이 죄로 더러워지지 않도록 삶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1. 피가 죄를 속죄한다(17)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가 속하느니라.”(17:11).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가 속하느니라.”(17:11). 생명이 피에 있기에 죄인의 생명을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피를 흘려 죽었다. 희생 제물의 피는 죄인의 생명 대신하였기에 짐승의 피가 죄를 속죄하였다. 레위기 16장은 피가 지성소에 뿌려져 죄를 속죄하는 것을 가르치는 반면, 레위기 17장은 희생 제물을 잡아야 하는 장소와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첫째, 희생 제물은 성막에서 잡아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는 성막 안에서 잡고 먼저 화목제물로 드려야 했다.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17:4).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먹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다.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리고 기름을 태운 후에 나머지 부분을 취하여 먹을 수 있었다(17:5-6).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다른 신을 숭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17:7). 이스라엘이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에서 끊쳐졌다.

 

둘째, 피를 먹지 말아야 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가 속하느니라.”(17:11).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동물이 피를 흘리면, 그 동물이 죽듯이 피에 생명이 있었다. 짐승의 고기를 피채 먹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기에 피채 고기를 먹지 말아야 했다.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피가 죄를 속죄하기 때문이었다. ‘속죄하다의 문자적 의미는 대속물의 대가를 지불하다.’이다. 이는 피가 생명의 값을 치루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명의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 뿌려진 동물의 피로 지불된 것이다, 동물의 피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뿌려져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셋재, 죽은 짐승을 먹지 말아야 했다.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자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나 물론하고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 정하려니와.”(17:15). 죽은 짐승을 먹는 것은 부정하게 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죽은 짐승을 먹으면 부정해졌기에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했고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야 정결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드려야 했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바알브올을 숭배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25:1). 그리고,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마귀에게 제사했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32:17).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과 바알 숭배 사이에서 갈등하며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였다(2:11).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숭배할 수 없음을 경고하셨다(16:13).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는 마귀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경고함으로 이방인의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0-21). 이 시대는 재물이 우상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있다.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은 조상 숭배나 각종 제사를 통하여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가고 있다. 그러나, 온 세상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 계시다. 레위기 1711절의 피가 죄를 속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9:12).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죄받아 거룩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레위기 17장은 생명이 피에 있기에 피를 통한 속죄를 가르치며, 이는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거룩은 사회 공동체에서의 성별된 삶이다(18-20).

 

거룩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정성이다. 하나님은 죄에서 떠나 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죄와 부정에서 떠나야 했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18:3). 애굽과 가나안은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이기에 그들의 풍속은 죄로 가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의 공동체에서의 구별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첫째, 거룩은 순결한 성적인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18).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백성에게 가까운 친척과의 성적인 관계를 금하셨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18:6). 하체를 범하다는 것은 성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남자가 아내로 구할 범위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였고 같은 부족안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혼할 수 있는 범위를 알아야 했다.

 

남자는 어머니 또는 계모, 그리고 자매나 이복 자매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손녀나 고모나 자부, 형제의 아내와도 성적 관계를 맺거나 결혼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아내가 월경을 하는 시기에 하체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타인의 아내와도 통간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아야 했다. 또한 자녀를 몰렉의 우상에게 주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했으며, 남자끼리의 동성 관계나 짐승과 교합하는 수간이 금지되었다(18:21-23). 성적인 부정함은 사람들의 순결함을 잃어 더러워지게 했고, 그 결과 땅도 더러워져 땅이 그 백성을 토하여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나안 족속들이 성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 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4-25). 이스라엘이 성적으로 더러워지면 가나안 족속같이 그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18:28).

 

신약은 음행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계모와의 음행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자를 출교할 것을 명하고 있다(고전 5:1-2). 그리스도인의 몸은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고전 6:13).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더럽히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음행을 피해야 하며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는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거룩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살전 4:3-5). 성도의 거룩은 음란과 색욕을 버리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이다.

 

둘째, 거룩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19).

 

이스라엘은 성적인 관계에서 거룩해야 하듯이, 사회에서 맺는 공동체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실천함으로 거룩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는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9:18). 이스라엘의 사회적 관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해야 했다. “...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십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낸 것이다. 레위기 19장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거룩은 십계명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룩은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는 거룩은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부모를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추수 때에 가난한 자와 타국인들을 위하여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않는 것이다(19:9-10). 보아스는 가난한 룻을 위하여 이삭을 다 줍지 않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2). 거룩한 삶은 이웃을 향하여 도덕질하거나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도덕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19:11-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웃을 압제하거나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미루지 않도록 하셨고 귀먹은 자나 소경을 함부로 대하거나 올무를 두지 말도록 하셨다(19:13-14).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재판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하며, 시장에서 공평한 저울과 추를 사용하여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19:35-36).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22:37-40). 사도 바울은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에 율법의 계명이 다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3:8-9).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구별된 사랑으로 거룩한 삶이 삶의 관계에서도 실천되어져야 한다.

 

셋째, 거룩은 이방인의 풍속과 구별하는 것이다(20)

 

거룩이란 가증한 이방인의 풍속과 부정함에서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풍속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었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20:23).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가증한 풍속에서 구별하여 살도록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유 삼으시고 구별하신 이스라엘은 거룩함을 지켜야 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0:26).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가증한 풍속을 따르면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았다. 레위기 20장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따르는 죄에 대한 형벌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 했다.

 

이스라엘이 몰렉에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하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20:2). 몰렉은 요단 동편에 사는 암목 족속의 우상으로서, 몰렉을 예배하는 자들은 희생제사로 자기 자녀를 바쳤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그 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20:3).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로 백성 주에서 끊겨졌다. 신접하는 것은 마술을 부려 미래를 예언하거나 사탄의 힘으로 영혼을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울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낸 사건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사울왕에게 임하였다(삼상 28: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이시기에 이스라엘은 귀신 숭배를 하는 신접한 자를 따르지 말아야 했다.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임을 당했는데, 저주한다는 것은 부모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20:9). 간음하는 행위는 죽음으로 심판을 받았다. 간음은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서 행하는 모든 성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성적인 죄로 죽임을 당하는 대상은 동성애의 죄와 짐승과 교합하는 수간도 포함되었다(20:13-16).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모든 관계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모든 관계에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 거룩의 관계는 하나님에서 시작되어 부모와 자녀들, 가나한 자와 외국인, 이웃이나 친척들, 노인들과 장애자들까지 포함된다. 심지어 거룩은 동물이나 땅의 추수의 열매를 통해서도 나타내어야 했다. 거룩은 부모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노인을 존중하고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며, 진리를 말하고 불의의 유혹을 이기는 것이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이웃을 대하는 거룩한 삶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3. 거룩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진 것이다(21-27)

 

거룩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한 것이다. 하나님이 구별하신 것은 거룩했으며 지속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하여 거룩함을 지켜야 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은 제사장과 성막의 성물(21-22)이며, 하나님을 구별된 절기(23, 25) 그리고 성막과 거룩한 이름을 구별하는 원리들이다(24). 다음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함을 지켜가는 규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제사장직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을 지켜야 했다(21-22).

 

레위기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의 거룩함의 기준을 가르치고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자들이기에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였다.

 

율법에서는 사체는 부정하였기에 누구든지 접촉하는 자는 부정하였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19:11). 이러한 이유로 제사장은 가까운 친척인 부모나 자녀 형제, 그리고 출가하지 아니한 친 자매 외에는 장례 절차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하지 말려니와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 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21:1-2). 제사장은 이방인의 장례의식과 같이 머리털을 깎거나 살을 베지 말아야 했고(21:4-5), 결혼에도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그리고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21:7). 거룩한 제사장은 결혼에서도 흠이 없는 여인을 아내로 취해야 했다(21:7-15).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아비를 욕되게 함으로 불살라야 했다(21:9). 이는 제사장은 자신의 거룩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자녀들의 삶도 구별되어 거룩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관유로 구별되었기에 제사장보다 더 높은 차원의 거룩을 지켜야 했다. 대제사장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야 했고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는 부모에게도 해당되었다(21:11-12). 대제사장은 처녀를 취하여 아내로 삼아야 했다. 대제사장이 성소를 더럽히지 말아야 했기에 순종함으로 거룩함을 지켜야 했다(21:14-15). 육체에 흠이 있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섬길 수가 없었다.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21:17). 하나님의 거룩은 완전함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 제물은 흠이 없는 짐승이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와 섬기는 자도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다. 흠이 있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물을 먹을 수는 있으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었다.

 

거룩과 부정한 것은 분리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은 깨끗한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지켜야 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하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22:2).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성물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다.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문둥 환자(13-14)나 유출병이 있는 자(15)와 부정한 사람이나 시체와 접촉하여 부정하게(11:39)된 경우이다. 부정하게 된 자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성물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는 심판을 받아야 했다.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은 제사장이 돈으로 산 노예와 그의 자녀들, 그리고 시집가지 아니한 딸이 먹을 수가 있었다(22:11-13). 성물의 일부와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외부인이 성물을 부지중에 먹으면 더럽혀졌기에 성물을 먹은 자는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했다(22:14).

 

육체적인 결함이 있는 자가 성소에서 섬기는 것이 제한되었듯이, 육체적으로 흠이 없는 짐승은 희생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다.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22:20). 거룩은 온전함으로 상징되었기에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과 같은 동물은 희생 제물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단 위에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22:22). 희생 제물을 드리려면 팔일이 지난 것을 드려야 했고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드리지 말아야 했다(22:27-28).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은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아야 했다.

 

제사장과 성물이 가르치는 거룩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거룩의 개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섬기셨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7:26). 흠이 없는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희생 제물이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9:14). 예수 그리스도는 흠없는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셔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다. 제사장의 신부는 흠이 없어야 했듯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5:27).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지기 위하여 흠이 없어야 하며 거룩해야 한다. 대제사장의 거룩은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높은 거룩을 요구받았다. 이는 교회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들의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목사인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함을 가르치면서 도덕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딤전 3:1-13). 감독은 자녀들이 단정함으로 복종해야 하며, 집사의 아내는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유적으로 영적인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흠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가족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선으로 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 대제사장은 부모를 장사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말아야 했듯이(21:11),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을 먼저 따르는 삶을 살아야 했다(8:21-22).

 

둘째, 하나님께 시간을 성별하여 드려야 했다 (23).

 

하나님은 이스라엘, 제사장과 성막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특정한 날과 절기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날을 구별하여 지킴으로 하나님의 거룩안에 거할 수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은 주중의 안식일과 일년 중의 일곱 절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구별된 삶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엿새 동안을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23:3). 안식일은 성회라고 하였다. 성회는 거룩한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막이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애굽에서 출애굽한 것을 기억하며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다.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23:5-6). 유대력으로 정월 십사일은 유월절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했다.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온전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상징했다. 첫 이삭을 바치는 초실절은 안식일 다음날이었다. 이스라엘은 보리의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며 추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예배자는 추수한 첫 곡식 단을 요제로 바쳤다.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23:11). 첫 이삭을 드리는 날에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드렸고 소제와 전제를 드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23:12-13). 안식일 다음날에 드리는 초실절은 정월 십육일로 일요일을 의미했다.

 

두번째 거둔 곡식을 드리는 절기는 칠칠절 또는 오순절로서 초실절이 지나서 오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가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23:15-16). 칠칠절에는 떡 두개를 가져다가 누룩을 넣어 요제로 드렸다(23:17). 칠칠절에는 번제와 소제와 번제를 드렸고, 화목제를 드려 추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칠칠절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음으로 가난한 자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도록 하였다(23:22). 일곱 번째 달의 첫 날은 나팔을 불어 기념하였고(23:24), 십일에는 속죄일로 아무일도 하지 말고 금식하며 스스로 괴롭게 했다(23:27). 속죄일은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엄숙한 날이었다. 초막절은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지키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였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23:42-43).

 

일곱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며 예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유월절에 희생돈 어린양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무교절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감을 상징한다. 성도는 죄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초실절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서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초실절이 유월절이 사흘 지난 날이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오순절은 초실절 이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다. 오순절은 성령이 교회에 강림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이후 오십일이 지나 성령이 교회에 부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순절날이 이리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1-2). 나팔절은 하나님의 강림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로부터 나팔 소리가 나며 공중으로 재림하신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속죄일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는 날이다. 속죄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장막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천년왕국을 의미한다(14:16).

 

셋째, 하나님의 처소와 이름은 거룩하다(24).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과 그 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다. 성소에는 분향단과 금촛대, 그리고 진설병을 놓는 떡상이 있었다. 백성들이 순결한 기름을 만들기 위하여 찧어 낸 감람유를 가져오면, 아론과 제사장은 등잔불을 정리하며 등대 위의 등잔을 끊이지 않고 켰다(24:2-4). 그리고, 제사장은 진설병을 두 줄로 여섯 개씩 떡상 위에 진설하고 맨 위에는 유향을 두었다. 열두 개의 떡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했다. 매안식일에 제사장은 떡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였고, 진열되었던 떡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다.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찌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24:8).

 

촛대와 진설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어두움을 밝히신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빛이 어두움을 밝히듯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는 빛이시다. 진설병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믿는 자에게 참된 생명인 영생을 주시는 주이시다.

 

하나님은 이름이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거나 저주하는 것은 금하였다. 아비가 애굽 사람이고 어미가 단 지파 사람이었던 자가 다른 사람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였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한 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24:15).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되 회중이 돌로 쳐 죽여야 했다(24:16).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 자의 죽음을 요구했고, 사람을 죽인 자는 생명으로 갚아야 했고 눈과 이를 손상을 입혔으면 자신도 동일하게 형벌을 받아야 했다.

 

넷째, 희년은 속박에서 자유하는 구속의 상징이다.

 

고대 시대에는 빚진 자는 자신의 자산 뿐만 아니라 자신이나 자녀들까지 팔려가 종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희년은 빚진 자를 보호하여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는 법이었다. 만일 희년과 같이 노예를 자유하게 하고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일이 일어나 사회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에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하였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5:8). 희년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땅은 원래의 주인으로 돌아가고 종은 자유를 얻어 자유인의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번째 되는 다음해에 시작하였다. 희년을 믿음으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안식년을 먼저 지켜야 했다.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25:4). 이스라엘 백성은 육년 동안은 밭에 파종하여 열매를 거두지만, 칠년째되는 해에는 안식을 지키며 파종하지 말고 쉬어야 했다. 안식년에는 땅에서 스스로 난 것을 종이나 객들, 그리고 들짐승들이 함께 취할 수 있었다. 칠년을 일곱 번 계수한 후 오십년이 되는 해에는 희년을 선포하고 종들이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25:10). 희년에는 땅은 팔았던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가며 종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쥬빌리(jubilee)라고 불리우는 희년은 속죄일을 알리는 요벨(yobel)이라는 나팔의 단어를 사용했다. 희년은 속죄일을 알리는 칠월 십일에 나팔을 불며 희년의 시작을 알렸다. 희년은 속박된 자와 땅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시는 구속의 사역을 상징한다.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땅은 원래 주인으로 돌아가고 종들은 매인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때에는 그와 그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 본족에게로 돌아가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리라.”(25:41). 가난하여 몸이 팔려 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그들이 자신의 기업으로 되돌려주어야 했다.

 

희년을 지키는 것은 믿음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안식년의 일곱 번째인 49년이 되는 해와 50년이 되는 해에 땅을 안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25: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3년간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51년이 되는 해에 추수하기까지는 거의 일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희년의 법을 지키면 안전하게 하시며 풍성한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25:21). 하나님은 육년에 복을 주셔서 삼년 쓰기에 족할만큼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아야 하는 것은 토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5: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사용하도록 하셨지만, 실제로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이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이다. 희년은 구속을 통하여 자유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형제가 가난하여 기업을 팔았다면 그의 친척이 판 기업을 사서 돌려주어야 했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25:25). 형제를 위하여 기업을 사서 돌려주는 것이 고엘이라는 기업무를 자의 책임이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룻과 나오미를 위해서 땅을 값을 치루고 돌려주었다.

 

희년이 속죄일을 알리는 나팔소리로 시작되었듯이, 희년의 자유는 메시야의 구속의 사역을 상징한다. 이사야 61장에서 메시야는 기름부은 자로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사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하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6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시면서 포뢰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하셨다(4:17-19). 이는 메시야의 사역이 죄의 종된 자에게 그분의 속죄사역으로 자유함을 얻게 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팔을 불며 시작하는 희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나팔 소리와 함께 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은혜의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했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섯째, 거룩한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다(26).

 

레위기 26장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26:3-13)과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삶(26:14-46)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우상을 세워 경배하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소를 공경하는 삶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삶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26:4).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농사가 풍년이 되고(26:4-5), 그들이 거하는 땅에서 안전을 누리며, 전쟁에서 승리하여 평안을 누릴 것이다(26:6-8).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인도하시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26:11-12).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그들의 삶에 큰 축복을 누리게 하지만, 불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심판으로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찐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26:21).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재앙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회개하지 않을 경우 다음의 단계에 걸쳐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재앙과 열병, 전쟁에서의 패배(14-17), 기근과 거문(18-20), 그리고 들짐승(21-22)과 전쟁, 염병(23-26), 땅에서의 추방(27-28)이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까지 회개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 중으로 흩으실 것이고, 그 땅은 황무함으로 안식을 누릴 것이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26:34).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칠십년간 그 땅을 안식하게 하시도록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성취되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역하 36: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돌아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26:44-45).

 

새언약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으로 축복을 누려야 한다. 야고보서 기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라고 했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 열쇠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는 주의 만찬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전 11:30). 갈라디아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라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얻게 될 것이다(6:33, 4:19).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 의와 평강의 열매를 얻게 된다고 했다(12:11). 그러나 마음을 계속해서 강팎하게 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아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6: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여 순종의 복을 누릴 것이다.

 

여섯째, 거룩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27).

 

레위기의 마지막 장은 하나님께 헌신한 서원에 관한 규율이다. 서원은 의무적으로 드리는 희생 제물이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었다. “감사로 하나님께 재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50:14). 서원의 중요성은 일단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항상 지켜져야 했다. 만일 자신의 서원한 것을 대신하여 드리고자 하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드려져야 했다. 서원은 자신을 드리는 서원과 동물, 그리고 집이나 땅과 같은 부동산으로 서원하여 드릴 수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을 하나님께 서원한 자는 값을 치루어야 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27:2).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남자는 오십 세겔 여자는 삼십 세겔 등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값을 치루어야 했다(27:2-8).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 성소에서 섬겨야 하지만, 성소의 직무는 레위인과 제사장들만이 섬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드린 자는 노예시장에서 거래되는 노예의 값으로 대신 성소의 가격을 정하여 드렸다. 당시에 한달 노동자의 품삯이 일 세겔이었다. 둘째 동물을 드리는 서원을 할 수가 있었다. 정결한 동물을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서원한 동물을 거룩했기에 변개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27:9).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다른 생축으로 바꾸면 둘 다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부정한 짐승을 하나님께 서원으로 드릴 수 있었다. 부정한 짐승은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었지만, 제사장들이 짐승을 팔아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거나 운송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만일 부정한 짐승이라도 서원한 후에 마음이 바뀌면, 그는 오분의 일의 값을 보상금으로 내고 다시 가져갈 수 있었다. 셋째로 집이나 땅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었다. 만일 서원한 집이나 밭에 대하여 마음이 바뀌어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한 후에 자기 소유가 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찌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27:15).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께 이미 구별된 것이기에 그것을 드릴 수가 없었고(27:26), 하나님께 바친 것은 하나님게 구별된 거룩한 것이기에 자신의 것으로 속하지 못하였다.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찌니라.”(27:28-29). 땅의 소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구별된 것이었고,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열째마다 하나님의 거국한 것이 되었다(27:32-33).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있더라도 실행해야 한다. 신명기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23:21). 하나님께 서원하지 않았다면 죄가 없지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행해야 한다. 전도서 기자는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면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고 하며 서원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우매자라고 했다(5:4-5). 하나님께 마음으로 서원한 것에 대하여 생각이 바뀌어 실행하지 아니하면 오분의 일을 서약에 대한 배상금으로 내야 했다. 하나님께 구별된 것은 거룩했기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나 십일조, 그리고 첫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에서 나실인의 사역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서약이었다(6:1-21).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하였다(삼상 1:11). 한나는 하나님이 기도 응답으로 아들을 주시자 사무엘을 성전에 드려 하나님의 종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8). 하나님은 한나의 믿음으로 보시고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하셨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서원하고 드린 것을 받으시고 더 크신 은혜를 베푸신다.

 

레위기는 1장에서 16장 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와 제사장 직분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나라가 되는 길을 제시하며, 17-27장 까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삶의 전 영역에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해야 했다. 거룩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삶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된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