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9) - 죄 아래 있는 인류(롬 3:9-20).

비전의 사람 2020. 7. 1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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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모든 인류는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첫 걸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 죄의 저주에서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를 찾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절에서 17절은 로마서의 서론으로서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며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320절 까지는 인류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은 우상을 숭배하며 불의를 행하는 이방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부하는 유대인에게까지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며 가르치고 있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독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39절에서 20벌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사람들의 죄에 대한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하여 임한다고 선포합니다. 다음은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죄 아래 있는 인류와 세부적인 죄의 모습,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는 절망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1.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죄의 권세(power)아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자체를 의미하기 보다는, 사람이 죄의 노예로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사람을 죄의 종으로 만드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로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이 죄를 범하게 함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게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의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함으로 의로움 대신 불의를 행하고 생명의 삶대신 하나님을 떠난 사망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죄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죄를 인격화한 표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4:7)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가인을 다스리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죄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가인은 죄의 권세에 굴복하여 아벨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죄의 권세는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강력한 권세에서 사람은 벗어나야 합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비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는 살아있는 인격과 같아서 사람을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어서 죄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64: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정한 자 같고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죄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 분이 우리의 삶의 생명이시며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종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자유하는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죄의 권세는 삶의 모든 영역을 타락시켰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로 죄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살아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했고, 노아도 방주를 지어 인류의 씨를 보존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술에 취하여 자신과 함이 죄를 범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3:10)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없다는 것은 한 사람도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롭다 라고 지칭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흠이 없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구약에서는 의롭다는 것을 정의로 표현했습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세데크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람은 벌써 하나님의 진노로 정죄를 받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분으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 영역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트렸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3:11).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20:3). 그러나 죄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지게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자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인 어두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영적 무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망의 삶은 총명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무지하고 마음이 굳어지는 육신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삶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원수되는 행동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3: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는 죄의 권세가 무지한 사람들을 사탄의 종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수단입니다. 모든 인류의 문명이나 부족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가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영적으로 무지하게 될 때에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18).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죄는 사람과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2).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1-3)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함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부패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에 마음이 죄로 더러워졌으며, 소행이 가증한 것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권세 아래 있기에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이 노예라 함은 죄가 사람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이 마음에서부터 입의 말로 나오는 악한 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3:13-17). 사도 바울은 입에서 나오는 몸의 지체를 연결하여 죄악성을 설명합니다. 이는 목구멍과 혀, 그리고 입술과 입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마음의 부패함을 보여줍니다. 무덤안에는 시신이 썩어 부패합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아 시신의 썩은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마음의 부패한 속성이 목구멍을 통해서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12:34-35)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은 마음에 악을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훼방하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마귀의 힘을 빌리는 것을 한 것은 악한 마음에서 찾아오는 악인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했기에 그 입에는 속이는 것이 가득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0-23). 우리의 마음은 열린 무덤과 같이 부패한 것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독사의 독과 같은 악한 말은 저주와 악독이 되어 사람들에게 비방과 모욕, 훼방과 같은 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3:2)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부패했기에 말에서 항상 더러운 말로 죄를 범하는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에서 선한 것이 나오도록 입에 파숫군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와 같이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9:14)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새로운 마음을 주실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37:26-27). 에스겔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는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 순결한 입술과 말이 흘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부패함으로 독과 악으로 자신을 더럽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로 인하여 피 흘리기에 빠르고, 다툼으로 인하여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3:15-17).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릴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어그러지게 하여 참된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8절에서 320절의 결론을 맺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19). 사도 바울은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19절의 율법은 헬라어로 노모스로서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의 말씀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망 가운데 거하는 온 인류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모든 입을 막는 것은 재판에서 죄가 드러나면 입을 막고 심판의 판결을 묵묵히 기다려야 하듯이, 온 세상은 죄의 정죄에서 유죄로 판결되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이기에 율법 앞에서는 사람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기에 사람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의에 대하여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선한 행실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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