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13) - 의롭다하신 자의 즐거움(롬 5:1-11)

비전의 사람 2020. 9. 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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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13) - 의롭다하신 자의 즐거움(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자입니다. 의롭게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특권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3:24). 이제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5:2),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과의 화목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합니다(5:11).

 

의롭게 된 자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드리며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제물을 먹고 마셨습니다(24:9-11).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의 의미가 있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먹고 마셨던 영광과 즐거움은, 의롭게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 자가 얻는 영적 유익에 대하여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합니다. 비록 환난이 찾아와 연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5:1). 로마서 51절의 한 구절은 로마서 1-4절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대속물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된 것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살아왔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인 해나 달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이 질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여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죄와 사망의 길에 들어서서 악을 즐겨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배후에는 사탄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죄의 권세로 사람들을 다스리며 사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따랐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함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2:1-2).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자녀란 의미입니다.

 

이와같이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성막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와 속죄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9:4-5). 속죄소는 대속죄일에 대제상이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가서 뿌려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죄받는 곳이었습니다.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이유는 피가 죄를 씻기 때문이며, 희생제물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화평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속죄는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의 피를 보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화목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소에 뿌려진 피를 보시고 화평하신 이유는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속죄소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화목하게 하시는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기에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리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불안과 염려가 찾아와 마음에 근심을 가져다 주지만,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가 있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면 우리는 절대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은 거짓 평안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안하여 방황하다가 사망의 늪에 빠져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에 우리의 영혼은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이 흔들리고 고통이 엄습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누리는 자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외로움과 염려를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유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지성소의 속죄소가 자비석인 이유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소 위에는 영광의 그룹들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죄인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처소인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제사장들은 거룩한 성소까지는 이를 수 있었지만 지성소는 거룩하게 구별된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려 속죄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성소에 뿌려 속죄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하늘의 속죄소에 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화목의 자리로 초청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은 은혜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찬양과 예배, 기도와 말씀,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은혜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죄로 인하여 어두움에 갇혔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13). 흑암의 권세는 사탄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죄와 사망이 다스림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물질과 권세와 세상의 헛된 영광에 사로잡혀 거짓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은혜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곳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구별되듯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는 영적으로 바라보며 느끼며 즐거워하는 주님의 나라입니다.

 

3. 우리는 환난 중에도 소망으로 즐거워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5:3-4).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환난이 주는 큰 유익을 누리는 자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5:3-4). 우리가 당하는 환난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환난이 시험과 근심을 가져오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는 축복임을 증거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도 환난은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환난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의의 길로 행하도록 징계하시는 이유가 있으며(12:7), 하나님이 우리를 욥과 같이 연단하셔서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신 환난이 있습니다(23:10). 그리고 죄로 깨어진 세상에서 불의로 인한 억울함과 깨어진 환경으로 인한 질병 등이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은혜 아래 살아가지만, 육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의롭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환난이라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환난이 감당해야 하는 헛된 고통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내와 연단의 시간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자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낳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아래와 거처의 합성어입니다. 무엇 아래 산다는 뜻입니다. 인내란 고난의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기름을 짜기 위하여 감람을 으깨거나 포도주를 짜내려고 포도를 깨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포도를 으깨어 포도주를 만드는 압축의 상황에서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이에 대하여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연단이란 증명된(proof),승인된(approval)'이란 뜻입니다. 인내가 연단을 이루는 것은 고난의 순간을 인내함으로 그 사람의 신실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환난이 찾아오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고난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핍박이 찾아오면 환난을 피하기 위하여 믿음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이나 환난이 찾아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견디며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환난의 과정에서 인내함으로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였고, 요셉은 노예 생활과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나타냈습니다. 예레미야는 적대적인 사람들의 핍박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환난이나 고난이 유익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견디게 함으로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검증되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여주신 소망을 우리게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추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로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26:15-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은 사도 바울에게는 사명이며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에서 인내하게 하셔서 연단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릇으로 쓰임받는 소망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소망은 그가 환난에서 인내하고 연단받아 신실한 믿음이 검증받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소망은 그가 환난에서 인내하며 연단받음으로 결국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연단받은 신실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가운데 인내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롭게 된 자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죄를 속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자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 의롭게 된 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내적인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라는 확신은 외적인 가르침이나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지만, 더욱 확실한 것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증거입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6)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고 기도에 응답하게 하시며 말씀이 살아서 깨닫게 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에 대한 확신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 언약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두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37:26-27). 하나님께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의롭게 한 자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난과 역경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사도 바울은 의인을 위하여 죽은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경건치 않은 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는 자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자들입니다(1: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자와 의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능력을 보혈에 있습니다. “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5:9).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보시고 죄인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법정인 용어로서 죄인된 자를 재판관이 의롭다라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더 이상 죄의 권세에 매이지 아니하고 자유하는 자가 되어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자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법적인 관계라면 화목하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후에 그 분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