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

바울의 생애와 사역

비전의 사람 2021. 3. 20. 15:03
반응형

 

 

1. 가족과 시민권

 

바울은 길리기아(Cilicia)의 다소(Tarsus)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제롬에 의하면, 그의 가족은 갈릴리에서 이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고, 그 지파의 가장 유명한 왕인 사울 왕의 이름으로 사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텐트를 만드는 업을 하고 있었으며, 사업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다소성을 소읍이 아닌 성’ (21:39)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당시에 500 드라크마의 재산이 있어야 했는데,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에 크게 기여를 한 사람에게 주는 특권이었다. 바울의 가족은 이와같이 다소에서 영향력있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사역을 하는데 큰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올바른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기에, 매질이나 십자가형을 면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2. 예루살렘에서의 교육

 

바울은 바리새인의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성장하였다. 유대법으로는 다섯 살이 되면 성경을 공부하였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의 전통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울도 이 규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열 살 때에 유대교의 중요한 문헌들을 암송하였고 또한 천막 만드는 기술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1:14). 그는 어릴 때의 강한 교육으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는 열심히 있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에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의 교육을 받았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2:3). 당대의 저명한 유대교의 선생인 가말리엘은 힐렐이 새운 랍비학교의 수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5).

 

3. 교회의 핍박자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교회의 심각한 핍박자였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13).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9). 사도행전은 그가 교회를 핍박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면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8:3). 그는 심지어 다메섹에까지 찾아가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4. 사도로의 부르심 (Call to Apostleship)

 

바울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간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핍박을 피하여 다메섹에 간 성도들을 찾아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구원을 받게 되고, 그는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부름을 받게 된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8:15). 바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정표가 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에 죽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21:23).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동기는 율법에 대한 헌신이었는데, 그의 율법에 대한 헌신이 오히려 자신을 죄로 인도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율법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할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셨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님은 바울을 부르셔서 그분의 사도가 되게 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되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국은 율법의 저주에서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5. 이방인을 향한 사도 (Apostle to the Gentiles)

 

바울은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된다. 그는 아라비아로 여행하게 되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1:17). 그의 활동은 그의 권위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돌아왔고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만났고, 15일을 유하다가 다소로 돌아왔다. (1:18-21).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수년을 보내면서 자신이 전해 핍박했던 신앙을 위하여 헌신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1:21-24). 바울은 후에 바나바에 의하여 안디옥의 사역으로 초청을 받게 된다. 안디옥에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위하여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 함께 안디옥에서 동역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11:19-26).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1:13).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사도로 부르심을 인정하였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약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2:8-9).

 

6. 예루살렘 공회 (Conference at Jerusalem).

 

안디옥은 기원전 300 년에 셀루스 1세 왕조에 의해 세워진 동방의 유명한 도시였다. 로마는 안디옥을 시리아의 지방 수도로 만들어, 로마의 지방 총독이 거주하게 하였다. 안디옥에는 약 25만 명이 거주하였고 상당한 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 황제인 시저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는 안디옥에 신전과 대형 목용탕 등 큰 건물을 세웠고, 헤롯 대왕은 도시의 북쪽에서 남쪽까지의 5km 의 길을 대리석으로 포장하기도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사역을 후원함으로써 이방인 기독교의 모교회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11:26-29). 안디옥 교회는 강력한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유대에 가뭄이 일어났을 때에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였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1:28-29). 이것이 갈라디아서 21-10절 설명된 예루살렘 공회가 열렸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야고보, 베드로와 요한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회를 통하여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도록 부탁하였고, 바울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 힘써 행한다고 고백하였다.

 

7.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The Missionary Journeys)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은 총 3번이 있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행하여 졌다.

 

1) 1번째 선교여행 (13-14).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구별하여 선교사역을 위해 파송하였다. (13:2-3). 그들의 선교여행에는 마가 요한이 동행하였고, 안디옥의 항구인 실루기아(Seleucia)에서 출항하여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Cyprus)를 향하였다. 구브로의 살라미에 이르러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였고, 구브로의 수도인 바보(Paphos)에서 총독(proconsul)인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심하게 한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13:12). 사도행전 1119절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환난으로 흩어진 자들이 구브로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브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여행하며, 밤빌리아(Pamphylian)의 버가(Perga)에 도착하게 된다 (13:13). 버가 지역은 열악한 기후와 습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 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Antioch in Pisidia)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이동한 지역은 고산지역으로 여행객들에게는 위험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산과 계곡에는 도적들이 출몰하였고, 거친 지형으로의 이동은 큰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2장에서 기록한 여행의 어려움과 개인적인 위험을 기록한 것이 이 지역을 여행할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6).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13:42-43). 그러나, 그 다음 안식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자 모이자,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로 결단하게 되고 극심한 핍박으로 인하여 안디옥을 떠나 루가오니아(Lycaonia)의 성인 이고니온(Iconimu)으로 향하게 되었다. (13:48-52).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에 갈라디아 지방을 만들엇고, 이 지역은 루가오니아를 비롯한 로마의 식민지인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의 지역이었다. 이들 도시들은 고립된 지역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로마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다른 지역보다는 덜 받게 되었다. 이고니온(Iconium)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의 큰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두 사도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의 두 성인 루스드라(Lystra)와 더베(Derbe)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14:5-7). 바울이 루스드라(Lystra)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자, 무리가 바울을 신으로 높이며 제사하려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찾아와 바울을 돌로 쳐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내치자, 후에 바울이 깨어나 더베(Derbe)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수많은 제자들을 세웠고, 밤빌리아(Pamphylia)의 버가(Perga)에서 말씀을 전한 후에 앗달리아(Attalia)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돌아오게 되었다.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공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의 사역을 통하여 큰 열매를 맺자, 유대인 사이에 큰 변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슈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였다. 이러한 이슈는 복음에 대한 문제였기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공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행위로 아닌 은혜로 구원받은 복음을 강하게 선포하였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5:11).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이 이방인 가운데 행하신 역사와 기적을 설명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하지 말것을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 공회는 야고보를 통하여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고, 몇 가지를 주의하도록 당부하며 마무리 하였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피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여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15:19-20).

 

2) 2차 선교여행(15:36-18:22).

 

바울은 안디옥에 돌아간 후에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새로운 선교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15:36). 그러나, 그들은 마가 요한의 문제로 인하여 심히 다투어 결별하게 된다.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구브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향하였고, 갈라디아 지역에 이르러 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지역의 교회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그의 사역에 합류하게 한다.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경건한 유대인의 어머님 밑에서 자랐고 칭찬받는 제자였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가장 신뢰받으며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다 (고전 4:17, 19:22, 딤후 1:1-8). 바울의 초기 계획은 소아시아 지역의 서부지방을 복음화하는 것이었지만, 성령께서 브루기아(Phrygia)를 지나 북서쪽 지방인 무시아(Mysia)로 인도하셨다.

 

드로아(Troas)의 항구도시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가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6:9-10).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바울 일행은 사모드라게(Samothrace)의 섬을 지나 마게도냐의 주요 항구인 네압볼리(Neapolis)에 도착하게 된다. 사도행전 16장의 10절에서 우리의 의미는 의사 누가가 바울의 팀에 합류한 시점임을 나타내고 있다. 네압볼리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로마의 유명한 도로인 에그냐시아(Via Egnatia)를 이용하였다.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와 베레아에 교회들을 세웠다. 유럽에서의 첫 번째로 얻은 영혼은 두아디라(Thyatira)에서 온 자주장사 루디아였다. 바울은 빌립보의 외곽에서 그녀를 만나 구령하게 된다. 네압볼리에서 약 16km 떨어진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Philip)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을 고치게 되자, 종의 주인들이 자신들의 수익원이 끊긴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매로 때리고 옥에 투옥시킨다. 감옥에서 지진으로 인하여 도망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히려 바울은 감옥에 남았고 자신의 믿음을 간수에게 나누며 그 가족을 모두 구원하게 된다. 바울이 감옥에서의 시민권에 대한 주장은 관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였고, 이후에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Amphipolis)와 아볼로니아(Apllonia)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Thessalonica)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무리가 믿음을 갖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으나,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하여 짧은 기간만 사역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야손(Jason)의 집에 들어가 바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야손을 잡아들이며 이르기를 이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섬긴다고 거짓 고소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베레아(Berea)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곳에서 헬라의 귀부인과 많은 남자들이 복음을 받고 믿는 자가 되었다 (17:12).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의 사역을 훼방하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레아에 남기고 아덴(Athens)에 이르게 되었다. 마게도냐 지역의 사역으로 바울은 세 개의 교회를 세우는 열매를 얻게 되었다. 그 교회들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레아의 교회였던 것이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에 대하여 따뜻한 사랑이 있었다. 그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통하여 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본이 되는 신앙을 칭찬하였고 (살전 1:8), 감옥에서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1:3-11. 4:10-20).

 

바울은 베레아를 떠나 아덴에 도착하였다. 아덴(Athens)은 지식의 중심지였으나, 그리스에서의 정치와 상업의 지도력을 잊어버렸다. 도시에 만연한 우상을 보고,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시장에서 에비구레오(Epicurean)와 스도이고(Stoic)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였다. 그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아레오바고(Areopagus)의 회원들의 관심을 끓었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에서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는 남성들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앞에서 복음을 전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의 메시지에 대하여 비웃었으나, 아레오바고 관원이었던 디오누시오(Dionysius)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가 되었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향하여 새로운 지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고린도는 아가야(Ahaia)지역의 총독이 거하는 수도였으며 로마 제국의 중요한 상업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는데, 그들은 텐트를 만드는 업을 하였으며 로마의 글라우디오(Claudius)에 의하여 모든 유대인은 로마를 떠나는 명을 받고 고린도에 오게 된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을 거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하였고,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의 집에 거하며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였고, 고린도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기록하였다. 고린도의 사역으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침례를 받았다 (18:8). 유대인들은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Gallio)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로마 총독은 유대의 종교의 문제로 간주하고 해산하였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겐그레아(Cenchreae)에 이르렀고, 그 곳에서 서원을 위하여 머리를 깎았다. (18:18). 바울은 에베소에서 잠시 머물며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일행은 에베소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유대의 가이사랴(Caesarea)를 통하여 안디옥에 돌아왔다 (19:21-22).

 

3) 3차 선교여행 (18:23-21:14).

 

안디옥에 잠시 머문 후에, 바울은 그의 선교여행을 재개하였다. 그는 이번에는 북서쪽의 소아시아 지역으로 여행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였고, 갈라디아서에 나왔듯이 유대인들의 위협에 맞서도록 성도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지는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에베소였다. 사도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서 2년 이상을 머물렀다.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0).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면서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요한계시록의 2-3장에 언급된 다수의 교회들이 이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은 제자들을 주요 도시에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했던 것이다. (1:7).

 

바울은 길리기아와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브루기아를 통하여 에베소로 여행하였다. 에베소는 수천명의 순례객들이 에베소의 신전에 있는 여신인 아데미(Artemis)를 경외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곳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에 위험과 소요로 인하여 큰 위험을 만나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8-9절을 통하여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532절에서는 에베소에서 자신의 사역을 맹수와 싸운 것에 비교하고 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 서신을 기록하고, 제자를 고린도의 교회(고전 4:17)와 마케도니아 지역(19:22)에 파송하면서 사역의 지경을 넓혀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지역에 활동하는 마술사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이 자신의 마술책들을 태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9). 그리고, 바울의 설교는 아데미 신상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아데미 우상을 파는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자, 은장색인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서기장이 그들의 모임을 해산하였다.

 

에베소의 소요 이후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헬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전에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고전 1:15-16).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믿는자들을 격려한 후에, 그는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물게 된다. 그는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공모로 인하여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게되고, 그 곳에서 드로아로 항해하게 된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설교시간에 잠을 자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기적을 베풀게 된다. (20:9-12). 바울은 드로아에서 아소(Assos)로 육지로 이동하였고, 앗소에서 배로 미둘레네(Mitylene)에 이르고, 그 곳에서 기오(Chios)와 사모(Samos)에 들리고, 그 다음날 밀레도(Miletus)에 이르게 된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나 고별 설교를 한 후에 고스(cos)와 로도(Rhodes)를 거쳐, 파다라(Patara)를 지나게 되고, 거기서 수리아의 두로(Tyre)와 돌레마이(Ptolemais)를 거쳐 가이사랴(Caesarea)에 상륙하게 된다. 비록 동역자들로부터 예루살렘에 가지 말것을 권고받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21:12-13).

 

바울이 몇 사람을 데리고 결례(purification rites)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로 인하여 성전이 더렵혀졌다고 바울을 고소하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위기를 면한 바울은 자신이 로마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22:30-23:11). 다음날 바울의 조카가 사도 바울의 생명을 해하려는 음모를 천부장에게 보고하게 되고, 천부장은 로마군의 보호아래 바울을 가이사랴의 총독인 벨릭스에게 안전하게 보내게 된다. 바울은 안디바드리(Antipatrs)를 통하여 가이사랴에 주후 58년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헤롯의 궁에서 약 2년간을 보내게 된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고 바울을 섬기는 천구들을 방문하도록 허용하기도 하였다. 벨릭스와 그의 아내인 드루실라(Drusilla)는 바울의 간증을 들었지만, 전혀 마음으로 믿지 않았다.

 

8. 바울의 로마로의 항해 (27:1-28:16)

 

바울은 베스도(Festus)가 주후 60년에 벨릭스(Felix)의 소임을 대신하기까지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 2세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지만 신앙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투옥되거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 동의하였다. 만일 바울이 가이사(Caesar)에게 호소하지 안았다고 한다면, 바울은 자유롭게 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호소는 그를 로마를 향한 향해로 인도하게 된다 (27-29).

 

지중해의 항해는 북서풍의 폭풍으로 인하여 어려운 항해길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부터 함께 한 아리스다고와 누가와 합류하여 함께 로마를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때 바울은 율리오란 백부장의 호위하래 다른 죄수들도 함께 로마로 항해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도시인 아드라뭇데오로 향하는 작은 배에 올랐다. 배는 시돈을 경유하여 구브로 해안을 지나 루기아(Lycia)의 무라성(Myre)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라는 큰 배로 옮겨탔다.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큰 배는 로마에 밀을 제공하는 배였다. 큰 배는 바울과 일행, 그리고 승무원들로 구성하여 276 명이 타고 있었다. 배는 살모네(Salmone) 앞을 지나 그레데(Crete) 해안을 의지하여 미항(Fair Havens)에 이르렀다. 바울은 겨울의 바람으로 인하여 미항에 머물고자 하였으나, 선장과 선주는 뵈닉스(Phoenix)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제안하였다. 그들은 순풍이 풀어 쉽게 목적지에 갈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 배가 14일째에 바다에서 표류하며 위험한 상황을 만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배의 모든 사람들을 구조하시는 비전을 보게 된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7:24). 열네 번째 되는 밤에, 배는 육지 근처에 이르렀고, 승무원들은 배가 바다에 부딪혀 파선할까 두려워 배를 버리고 도주하려고 하였다. 날이 새자 해안이 보이자, 배가 해안을 향하여 움직이다가 배가 갇히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배에 있던 사람들이 헤엄쳐 육지에 이르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고자 하여 죄수들을 죽이는 것을 막게 된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27:43-44).

 

바울과 일행들이 상륙한 섬은 말리데(Malta)라는 작은 섬이었다. 이때 보블리오(Pulbilus)라는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이 찾아와 그들에게 음식과 유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였다. 바울의 일행은 좋은 기후의 조건을 기다리며 겨울을 말리데에서 보내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로 누워있을 때에 치유하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였다. 말리데에서 3개월을 지낸 후에, 바울은 율리오의 호위아래 이달리야로 가는 애굽 배에 승선하였다. 그 배는 시실리의 수라구사(Syracuse)3일동안 정박한 후에, 레기온(Rhegium)에 들러, 보디올(Puteoli)을 거쳐 로마에 향하게 되었다. 보디올은 애굽에서 로마로 가는 곡물을 받는 항구였다. 보디올의 성도들은 일주일간 바울을 영접하였고, 그 후에 바울과 일행은 로마를 향하여 여행하였다. 이달리야의 로마에 도착하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압비오 저자(the Forum of Appius, 로마로부터 43 마일이나 떨어짐)와 산관(Three Taverns, 33 마일이나 떨어진 곳)까지 찾아와 사도 바울을 영접하였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2년을 지냈으며 네로에게 호소한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