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

사도바울인물강해(11) - 믿음으로 결단하는 삶

비전의 사람 2012. 11. 2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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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인물강해(11) - 믿음으로 결단하는 삶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더라.” (행 21:13-14).

 

우리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아오는 고통이나 갈등과 영적 전투에서 완전히 자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온전히 헌신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가 걸어간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고통과 환난의 연속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여러 번 자신의 생명을 잃을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그 길을 향하여 확신을 가지고 걸어간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을 배우며,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하여 얻는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바울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바울이 가는 선교의 길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은 더욱 심각한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의 큰 소요가 있기 전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 19:21).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에 가서 사역을 하고, 더 나아가 스페인으로 가서 선교 사역을 지속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1) 바울의 목적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15:25-27).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절실한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사도들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부탁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권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갈 2:10).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데살로니가와 고린도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 그는 이방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편을 알게 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이들 성도들은 유대의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빚이 있음을 알게 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도록 부탁하지 않았다면, 복음은 결코 이방 세계로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그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됩니다. 비록 그는 로마에 가본 적이 없지만, 그는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안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물질로 섬기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성도들이 저들을 위하여 사랑의 헌금을 했고, 그것은 바로 영적인 빚이 있는 이방인의 교회가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15:25-27).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적인 필요를 나누자,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빚진 자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립보, 베레아, 그리고, 데살로니가와 같은 마게도니야의 교회들은 돕는 일에는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희생적인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고 고린도 후서에서 그들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환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 9:1-4).

 

여기에서 성도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영적인 깊이가 약했던 고린도 교회도 결국 반응하게 되며,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섬기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고후 9:6-8). 여러 교회의 후원으로 인하여, 바울은 물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위험한 상황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 가지의 기도 제목을 부탁합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롬 15:31).

 

첫째,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구원을 얻도록 기도 부탁합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 (롬 15:31). 바울은 경험으로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적의가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이러한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이 얼마나 큰 핍박을 당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종종 그들은 바울의 생명을 취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물론 바울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들과 같이 믿는 자들을 핍박하여 죽이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둘째, 성도들이 바울의 선의를 잘 받기를 원했습니다. “...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롬 15:31b).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노력하여 모은 돈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편견을 가지고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엄격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로부터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유대인 교회들에까지 침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일에 대하여 성도들이 기쁨으로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2) 성령이 바울이 처할 위험을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2-23).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대하여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령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닥쳐올 어려움을 듣게 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만났을 때에 이러한 사실을 나누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2-23).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루살렘에 가지만, 성령으로부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듣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에게 심각한 핍박이 있을 것임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이러한 예언의 말씀은 바울이 밀레도를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서 칠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그는 동일한 말씀을 받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행 21:4).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은 복음의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희생할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바울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까워오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에, 아가보 선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전에 예언을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 11:28). 그때 예언의 말씀대로 흉년이 들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부조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이제 수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동일한 목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때 아가보가 예언을 하게 됩니다.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0-11).

 

가이샤랴의 성도들이 이러한 예언을 듣자, 그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2). 그들은 놀랐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알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가보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인정이 된 자이기에, 그의 예언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바울은 자신에게 심각한 어려움이 있을 것인줄 알았지만, 그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 성도들이 바울의 결단을 듣자, 그들은 포기하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14).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기에,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비록 성령님이 바울에게 닥칠 위험한 상황을 미리 알려주셨지만, 그들은 주님께서 바울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다가올 환경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3) 바울의 확신은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행 21:13).

 

사도 바울의 결단과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발견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들에게 소망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의 삶과 사역은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발견하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을 높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형식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방인들에게서 모금한 부조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지만, 그를 향한 유대인들의 시선은 냉정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일행은 나손의 집에서 유하였고, 그 후에 야고보와 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행 21:16-17). 바울은 그들에게 이방인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나누며, 이방인들이 복음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나누게 됩니다. 비록 누가는 이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조금을 전달했다는 구체적인 보고는 없지만, 우리는 이 순간에 바울이 그들에게 부조금을 전달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한 자들을 위한 부조금이 예루살렘으로 온 주요한 목적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유대교의 규례에 참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0).

 

영적 지도자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을 받으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 21:19-20).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들은 이방인들이 보내준 사랑의 헌금을 보면서 진정으로 이방인들의 회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헌신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들의 반응은 큰 격려가 되었지만, 그는 어려운 문제를 직면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향해 가지고 있는 편견의 태도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행 21:20). 바울의 마음을 어렵게 한 것은 그들이 품은 오해였던 것입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행 21:21).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루머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디모데가 아버지가 이방인이기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대인들과 소통을 더 잘 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례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한 것은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킴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구원의 핵심 진리가 아니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유함을 사용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0).

 

오해를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야고보와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행 21:22). 그리고, 바울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자신들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행 21:23). 그들은 네 명의 서원한 자들이 곧 정결의 시간을 통과할 것을 기억합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실천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들의 의식에 함께 참여하고 그들의 비용을 부담할 것을 권고합니다.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 21:24). 바울은 이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고 목소리에서 긴박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들의 조언대로 행하게 됩니다. ‘결례’란 서원한 자들이 서원 기간 전, 후에 자신의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해 드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례의 마지막 날에 제사 예물을 드려야 했는데 이 경비를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이에서 가난한 서원자들을 위해 제물의 비용을 대신 물어주는 것은 대단한 미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결례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이 은혜의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결례를 행하는 자유함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30).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 계획으로 인하여 오히려 바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오순절의 의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서 왔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행 21:27). 그들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복음 전하는 바울을 거절했을 것이며,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 사역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이들은 바울을 향한 소요에 가담하려고 했습니다. 전에는 바울이 해를 입지 않고 피했지만, 이번에는 성령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바울이 감금되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들 사람을 노엽게 한 것은 바로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바울을 향한 편견으로 인하여, 그들은 이 사람이 성전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행 21:29).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유대교의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의 바깥 뜰에는 올수 있었으나, 안뜰은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즉, 성전은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뜰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만일 이 규정을 어기면 그 사람은 죽음으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로마 정부는 산헤드린으로부터 이러한 규정을 위반한 사람에 대하여 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드로비모를 경건한 장소로 들여왔다면, 그는 유대법을 위반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거짓으로 바울을 고소하여 그를 비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군중들은 유대인들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30).

 

3) 바울이 위기에서 도움을 얻게 됩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행 23:10).

 

군중들이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낸 후에 그를 애워싸게 됩니다. 그들의 목표는 바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행 21:31). 만일 로마 군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영문은 당시 예루살렘에 파견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요새를 의미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을 로마의 군영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구해주게 됩니다.

 

바울은 이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군중들에게 연설을 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바울은 허락을 얻은 후에, 그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 연설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언어를 듣게 되자, 군중들은 갑자기 조용해지게 됩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의 교육의 배경을 나누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사실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구원받고 변화된 사실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이야기하자, 군중들이 다시 소동하게 됩니다.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지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행 22:22-23).

 

바울의 배경을 알지 못하기에,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이 심각한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큰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채찍질하고 신문하라고 명합니다.

 

이러한 절차는 로마나 헬라에서는 죄수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통상적인 절차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불구로 만들 수 있는 심각한 고문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을수도 있는 형벌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습니다. 즉, 천부장의 명령이 실행되면, 바울의 사역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역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법은 시민권자에게 재판도 하지 않고 사람을 결박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문하려던 사람이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도록 허락을 얻게 됩니다.

수년 전에는 스데반이 공회앞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제는 바울이 그 자리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산헤드린 앞에 서는 것은 로마의 심문보다 더 위협적이고 위험했습니다. 편견과 교만과 악의가 가득한 산헤드린 공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일치가 않되고, 분쟁이 일어나 오히려 바울이 그들에 의하여 찢겨질까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천부장은 다시 바울이 로마의 관할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한편 분노에 가득한 40명의 사람들은 바울을 죽이기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의를 하게 됩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행 23:12).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계획을 산헤드린 공회에 말하고, 바울을 잡기 위해 계략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할 기회를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주님은 바울을 위험에서 도우십니다. 주님은 바울의 조카로 하여금 그 음모를 알게 하십니다. 바울의 조카가 일어날 일에 대한 음모를 알게 되었고 바울에게 이 정보를 전해 주었고, 바울은 그를 천부장에게 보내어 음모를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이 안전한 가이사랴로 보내어 로마의 총독인 벨릭스 앞에 서도록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모금한 부조금을 전하고,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은 냉담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데반의 목숨을 취했던 것처럼, 바울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위기에서 도우셨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역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도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어떠한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언급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도바울에게 큰 어려움이 찾아오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를 위하여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바울의 고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한 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행 25:12).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비록 바울은 어려움을 예상했지만, 그는 동료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하여 더욱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시의 간증을 듣게 되리라 생각하지만, 군중들이 그의 간증에 대하여 너무 빨리 거절했고, 산헤드린 사람들이 바울의 생명을 취하는 음모에 협력함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실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했고, 그는 이제 여행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인으로가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여행이 2년이란 시간을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의 총독인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 수년 전에는 유대의 다른 총독이었던 빌라도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선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벨릭스 앞에 서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선 장면을 떠오르며 깊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바리새인으로서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에 충성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벨릭스 앞에서 자신이 거절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제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거짓으로 바울을 모함했습니다 (행 24:6).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여 이러한 고소를 거부하지만, 자신이 확신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인정했습니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의 부분에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고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을 줄 것을 기대하여 결판을 늦추게 됩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행 24:26). 아마도 그는 바울이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전달해 준 큰 돈에 대하여 듣고 바울이 큰 부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바울을 2년 동안 가두게 됩니다. 물론 바울에게는 다른 죄수보다는 더 많은 자유를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까 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행 24:23). 벨릭스는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와 같이, 벨릭스는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한 것입니다. 사실, 벨릭스가 베스도에 의하여 교체되었을 때에,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그를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드소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행 24:27).

 

바울은 다시 베스도 앞에 서게 됩니다. 베스도 역시 유대인들을 의식함으로 바울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몰고가려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거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행 25:9). 그러자, 바울은 로마 시민의 특권을 주장함으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행 25:11). “... 내가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행 25:11).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인의 가장 강력한 리더인 산헤드린 앞에서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다음 사역지인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설 기회를 얻게 됩니다. 비록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으로 정신이 나갔다고 결론했지만, 아그립바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행 26:32).

비록 상황은 자신이 희망한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마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과정을 통과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로마로 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중심에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로마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로마가 하나님의 복음으로 놀랍게 변화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고난을 통해서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기와 어려움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순간순간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리며 희생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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