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72) - 종교적인 신앙인에게 임하는 화(마 23:13-28)

비전의 사람 2021. 5. 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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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72) - 종교적인 신앙인에게 임하는 화(23:13-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책망하신 후에 구체적으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라는 의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극도의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재난이나 재앙이 찾아올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팔 재앙이 이 땅에 내릴 때에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9:12). 화가 미친다는 것은 재앙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미칠 재앙은 지옥이라고 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33).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엘리트였지만, 그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영적 절망의 상황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의 화 이외에도 위선, 지옥의 자식, 소경된 인도자, , 독사의 자식,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피를 흘린 살인자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부패한 영적 지도자들에 대하여 무척 분노하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입니다.

 

첫째,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영적인 지도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양들을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 되셔서 누구든지 그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참된 생명을 주심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의지하여 천국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의에 만족하며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지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아버린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을 천국에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아 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천국문을 닫은 것은 예수님을 거절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2).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천국의 문을 닫고 있으면서 다른 민족들을 유대교로 개종하여 지옥 자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나라의 사람들을 설명하며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2:10)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65절에서는 “...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6:5)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가 유대교에 입교하는 노력이 유대교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방에서 유대교로 입교했지만,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로 두루 다니다 한 영혼을 얻었지만, 도리어 그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천국문을 닫아 두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문을 닫아 두고 신유나 은사가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국문을 닫고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미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문을 닫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메시지를 세상에 주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문을 닫고 다른 사람도 천국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인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영적인 무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23:16).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소경된 인도자는 영적으로 무지한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분별력으로 백성들을 인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왜곡된 관점으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소경된 모습은 맹세하는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어야 했지만, 형식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다고 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23:16). 그들이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다는 것은 그들의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예물로 드린 금도 있었고, 성전 안에 금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보다도 성전의 금이 더 소중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보다 더 소중한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맹이요 소경들이요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23:17)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칭 의롭다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며 소경된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금과 성전 중에 어느것이 더 크냐고 물으신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성전보다 더 크게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23: 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단으로 맹세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예물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큰지를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안에 있는 제단으로 인하여 예물이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리 귀한 예물이라도 제단보다는 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란 의미는 출애굽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있는 거룩한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네가 칠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29:37). 단은 성막에 있는 거룩한 번제단이었습니다. 번제단이 성막에 세워진 후에 희생의 피와 거룩한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해야 했습니다. 그리하면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여 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029절은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30:29)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성전의 거룩한 제단과 접촉하면 거룩해 지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도 성전이 금을 거룩하게 하고, 제단이 예물을 거룩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금이나 예물보다 성전의 거룩함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이 가득했기에 성전보다 금을 더욱 거룩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에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23:20-22). 주님께서는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예물로도 맹세하는 것이며,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 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과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을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19: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지켜야 했고, 맹세할 때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맹세의 규율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에 성전이나 제단, 그리고 하늘로 맹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성전이나 제단, 하늘로 맹세하면 그들의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성전의 금이나 예물로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맹세는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30:2)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수기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맹세를 지켜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존중하기 보다는 금이나 예물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기에 영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23:23).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위선이란 뜻입니다. 위선의 특징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영적인 지도자들이었지만, 주님의 눈에는 위선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두 가지의 모습으로 경고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23:2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찾아오는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생활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채와 향신로의 재료로 사용하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들이 재배하여 추수한 채소와 향신료에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밤이 새도록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나누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에 제도화하였지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야곱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시고 공급자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하는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일조도 행해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가르치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쉬운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듯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물질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의와 인과 신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의와 인과 신을 지킨다면, 그들은 기쁨으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중하게 여기는 의와 인과 신은 무엇인가요? 주님의 말씀은 미가서 6장의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는 공의와 의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사람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정의이며 의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무시하고, 약속을 어기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은 자비를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은 믿음과 신뢰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와같이 중요한 공의와 사랑과 믿음을 버리고 외형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은 의와 사랑과 믿음을 버렸을까요?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자신의 탐욕의 마음을 십일조라는 외형적인 것으로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텅빈 마음을 사람들이 주는 칭찬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외형적으로 예배와 십일조를 드리면서,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과의 바른 관계와 하나님과 이웃 사랑,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와 인과 신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와 인과 신을 지키면서 외형적으로 예배와 십일조의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으로 무지한 바리새인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하셨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3:24).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실 때에 채를 이용하여 하루살이를 먼저 걸러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살이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곤충으로 여겼기에, 하루살이를 포도주와 같이 마시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 약대도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루살이는 가장 작은 곤충이기에 하찮은 존재였지만, 낙타는 가장 크고 유용한 가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었지만, 약대는 부정한 동물임에도 가장 크고 중요하게 여겼기에 삼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서 정결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낙타를 삼키는 것은 실제적으로 더욱 큰 탐심의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하며,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가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그릇과 무덤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긋하리라.”(23:25-26). 주님께서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지만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듯이, 그들은 안을 깨끗이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회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7-28).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했지만, 안으로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을 가는 중에 실수로 무덤을 만지거나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면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됨으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순례의 무리에서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무덤을 회로 칠하여 무덤임을 표시했습니다. 무덤이 그 안에는 뼈와 시체의 썩는 것이 가득했지만, 무덤의 밖에는 회로 칠했기에 깨끗하게 보여졌습니다. 이와같이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행위로 감추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죄와 탐심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