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1) -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롬 9:14-33).

비전의 사람 2021. 5. 12. 18:0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0-3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육신이 아닌 약속으로 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택하셔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것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모습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이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며 뜻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 수 있느냐고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셨고, 믿는 자에게는 긍휼의 그릇이 되게 하셨지만 믿지 않는 자는 진노의 그릇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 사람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기에 불의가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9:14).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선택적인 주권에 대하여 불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9:14). 이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불의가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 3319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실 때에 얼굴은 보여주지 않으셨고 지나 가실 때에 등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 ...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자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세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 삼천명 만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었다면 이들을 버리지 마시고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여 멸망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의가 없으신 이유는 우리는 모두가 죄인으로서 형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란 멸망하여 지옥에 갈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지옥에서 건지셔서 구원하셨고, 더 나아가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하여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온 은혜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하나님은 원하는 자나 달음박질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 916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9:17). 바로가 애굽의 통치자로 세워진 것은 하나님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비록 바로는 세속적인 나라의 통치자였지만,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세우심으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 분의 거룩한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종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도록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도리어 이스라엘 민족을 핍박하였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도전했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5:2).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하여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입성할 때에 여리고의 거민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즉 바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강팎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마음을 강팎하게 하여 모세를 대적하였지만,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팎케 하심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9:18).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팎케 하시는 것은 그 분의 주권적인 섭리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바로가 명령했지만,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남자를 살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심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는 각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의 강팎함과 죄악성에 있었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통치자로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였고,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한 공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배후에는 항상 공의로우신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2. 토기장이신 하나님은 믿는 자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9:19).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팎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9:19)라고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을 강팎하게 하신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강팎한 자의 허물을 책망하시느냐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누가 그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팎하게 하셨다면, 바로가 불순종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난 것이기에 어찌 그를 심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게 바로와 같은 자들의 책임을 돌리려는 자에게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9:19). 사도 바울은 감히 하나님께 대꾸하는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유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있음을 상기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한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9:21). 이는 이사야 29장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29:16). 토기장이와 진흙은 다릅니다. 진흙은 토기장이에 의하여 빚어지기에, 그 권한이 토기장이에 있는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진흙이 토기장이를 지칭하며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며 자신들은 미생물에서 진화된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빚음을 받은 진흙이 자기를 빚은 토기장이에게 총명이 없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부인 할 뿐 아니라 저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진노를 가져올 불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9:22-23).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실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사람을 예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에 대하여는 진노의 그릇이 되어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기에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2: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심으로 유대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진노의 날 임할 진노를 쌓고 있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그들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회개치 아니함으로 진노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를 미리 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부여함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여김을 받은 그릇에 대하여는 영적인 부요함을 보여주십니다. 긍휼의 그릇에 속한 자는 누구인가요? 그는 바로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9:24). 하나님은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셔서 구원을 베푸시고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자들입니다.

 

3. 하나님의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9:25).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것을 인용했습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9:25-26). 이는 호세아 23절과 호세아 1:10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내 백성 아닌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는 것이 이방인의 구원의 역사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이방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받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된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9:27). 이는 이사야 102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 것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믿는 자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9).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의 씨를 남겨 두셨기에 지금과 같이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씨를 남겨 주셔서 생존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그 분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하여 불평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 긍휼의 그릇이 된 이유는 믿음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0-32).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의를 얻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함으로 진노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습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존하여 의롭게 되려고 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라 함과 같으니라.”(9:33). 사도 바울은 이사야 814절과 2816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보배가 되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가 넘어지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부딪히는 돌이 되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보배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역사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