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9) - 거짓이 없는 사랑(롬 12:9-13).

비전의 사람 2021. 8. 4. 17:45

로마서 강해(39) - 거짓이 없는 사랑(12:9-13).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교회의 덕을 세우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은사는 말씀을 전하는 예언과 섬김과 가르침, 그리고 위로와 권면, 구제와 다스림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자가 서로를 향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향하여 사랑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진실한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9).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사랑이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랑은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하지만 마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거나 미워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주님께 무리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14:44)라고 했습니다. 즉 유다는 무리들과 미리 작전을 짜서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잡아 끌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께 찾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이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고 잡아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표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아니었기에 거짓된 마음에서 거짓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요한 1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사랑으로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특징이 먼저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즉 위선이 없는 참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9). 악을 미워하는 것은 악한 것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혐오스러운 영화 장면이 있을 수도 있고, 환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혐오하는 음식을 보면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참된 사랑이 가득하다면 악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한 의미에는 거룩함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습니다. 선에 속하다는 것은 선과 연합하는 의미입니다. 결혼이 친밀한 관계에서의 연합이듯이,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지만 선에 속한 삶을 살아갑니다. 즉 사랑은 선과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과 연합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화된 마음과 생각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2. 진실한 사랑은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

 

진실한 사랑은 서로에게 표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형제의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라는 의미입니다. 형제의 사랑은 헬라어로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가정에서는 형제들일 것이며, 교회에서는 지체들을 향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함께 섬기는 지체들을 향하여 필라델피아, 즉 형제의 사랑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우애하고는 서로에게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하여 마음을 다하여 깊은 관심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복수형인 아가파이는 교회의 고동체가 함께 교제하며 음식을 나누는 애찬을 의미합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피와 기름의 제사를 드린 후에 음식을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과 예배자가 함께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떡을 나누며 서로 교제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제자의 표식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13:34-35).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비로서 주님의 제자인 줄을 모든 사람이 알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로서 유력한 차세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 부으심으로 인하여 다윗의 탁월함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이 비록 사위이긴 했지만 그를 죽여서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요나단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다윗을 더욱 미워했습니다. 사울의 사랑은 거짓되고 위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사울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했기에 참된 사랑의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안에 거짓이 없었기에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0장은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7).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할 수 있었던 모습은 필라델피아의 사랑, 즉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헌신할 뿐 아니라, 서로를 먼저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2:1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존경한다는 것은 지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의 존경과 공경은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을 공경하는 것도 존경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왕을 공경하듯이 모든 사랑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형제를 왕과 같이 존경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겸손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채워짐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충만함을 입었기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에 다른 사람이 세워지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도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 우리의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존경심으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3. 진실한 사랑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2:11).

 

진실한 사랑은 서로를 향한 형제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듯이,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분을 섬기는 모습을 통하여 증거될 수 있습니다.

 

섬기라는 단어는 둘로스라는 노예 또는 종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종의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과 동등한 관계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길 때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것은 해야 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주저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것은 오늘 할 일을 내일 미루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항상 미루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게으른 것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미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을 미루고 하지 않는 것이 게으른 것입니다. 잠언서는 게으름에 대하여 다음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20:2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찌라도 얻지 못하리라.”(20:4).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 함이니라.”(21:25).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22:13).

 

게으른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리어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사명을 회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부지런하다는 것은 속도를 내면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10시간에 마칠 일을 부지런한 사람은 5시간에 마치고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에서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열심을 품는 것은 성령으로 뜨거워지는 모습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뜨거워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뜨겁게 섬길 때가 성령의 강한 역사로 구원을 받은 직후나, 또는 하나님의 강한 역사로 마음이 뜨거워질 때 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과 시련에서도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즉 그는 게으르지 않고 성령의 뜨거운 역사에 사로잡혀 주님을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의식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여기며 성밖에 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시 일어난 후에 더베에 가서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향한 그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맺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찬양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보에서 떠난 후에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열정을 통하여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시련과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열심을 품고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사랑은 거짓이 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형제의 사랑으로 먼저 존경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사랑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