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강해(89) - 그리스도의 고난(마 27:27-44).

비전의 사람 2021. 10. 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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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89) - 그리스도의 고난(27:27-44).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27:27-28).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사탄의 집요한 공격으로 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시자 헤롯 대왕이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어 두살 미만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헤롯의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며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에 사탄의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사역이 진행되면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으로 밀어 죽이려고 시도했고,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배척하였고 기회가 되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제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사탄의 공격은 점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죽음에 넘기웠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소하며 죽음에 이르는 결정을 하고 로마에 넘겼습니다.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라고 판결하고도 유대인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도록 넘겼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떨어지면서 예수님은 육체의 극심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신 주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27:27-28).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으로 들어가 온 군대를 모았습니다. 당시의 로마 군대는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고, 군대의 규모는 약 600명이었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로마에서 온 이탈리아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시리아에서 징집되거나 자원한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군에 소속되어 로마의 군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다른 죄수와 같이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어떻게 모독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28-31).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기 전에 뼈나 쇠조각이 박힌 가죽 채찍으로 채찍질했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하기 전에 채찍질을 해서 미리 고통을 주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심으로 온 몸의 살이 떨어져 나가는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하면서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22:1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으로 살이 떨어져 나가 뼈가 보이는 처참함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홍포는 로마 군인들이 입는 옷으로 왕권을 상징합니다. 이는 자주색의 옷으로 낡은 로마 군인들의 옷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자주색의 낡은 옷을 입힌 이유는 왕이신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롱했습니다. 갈대는 왕의 주권을 상징하는 홀을 대체하였고, 왕을 경외하기 위하여 무릎꿇는 시늉을 하면서 예수님을 회롱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은 후에 머리를 갈대로 쳤습니다. 그리고 희롱을 다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받으신 조롱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고 더 낮아지셔서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겸손하신 예수님을 처참하게 짓밟으면서 마치 사람이 아닌 벌레와 같이 대우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수치심을 주어서 자신들의 놀잇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는 중에도 인내하며 참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조롱당하는 선지자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처철하게 조롱당하시며 죽어가신 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로 부터 조롱을 받으며 지하 우물이나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모세도 미리암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고, 백성들로부터 불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멸시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는 과정에서 먼저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을 당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고, 채찍으로 온 몸을 맞아 살이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찾아오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항상 행복해야 하는것이 아닌가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여정에서 자주 찾아오는 것이 괴로움 또는 고통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찾아오는 괴로움도 있고, 내부적인 갈등에서 찾아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는 많은 눈물과 희생과 헌신, 그리고 영적 싸움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의 현장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27:32).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때에 아무도 곁에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전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기꺼히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굳게 결단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에 아무도 곁에 나타나는 이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나가실 때에 로마 군사는 예수님이 너무 지쳐서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자 구레네 사람인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27:32). 일반적으로 정죄받은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이 십자가를 형장에서 바로 세우고 죄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했습니다. 로마 군인이 예수님을 위하여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너무 약해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처럼 되도록 힘써 기도하시며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 헤롯, 빌라도 등으로부터 여러 번의 재판을 받으시며 한 숨도 자지 못하셨습니다. 더구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기둥에 묶어놓고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채찍질을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십자가를 질 힘이 없으셨습니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가 없는 것을 알고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이 십자가 형장에서 죽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 상태로 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시면서 죽으실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누군가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이 마시도록 했습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27:33-34). 쓸개 탄 포도주는 고통을 경감하게 하는 마취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몰약이 든 포도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몰약의 성분 중에 나르토틱 성분은 마약의 성분이 있어서 잠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한 존경받는 여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받는 사람들이 고통을 덜 느끼도록 이러한 몰약을 사형수들에게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더 겪도록 하는 의도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보신 후에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주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대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진통제를 거절하신 이유는 그 분의 몸으로 죄에 대한 고통을 직접 겪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당하신 고통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모든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셨기에, 인간이 겪어야 할 최고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의하면 속죄제로 드려지는 송아지는 그 피는 성소에 뿌려지고, 송아지의 가죽과 고기는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로 태워야 했습니다.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찌니라.”(4:11-12). 이와같이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피로써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3:11-1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며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군인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실행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죄수를 십자가에 줄로 묶어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아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김으로 수치심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 3시인, 즉 오전 9시에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눕힌 후에 팔을 거기에 묶었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못으로 오른손과 왼손에 큰 망치로 박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운 후에 발을 펴고 각 발에 쇠못을 큰 망치로 박았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주님의 옷을 벗겨 제비 뽑아 나누고 그곳을 지켰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갖고, 속옷은 통으로 짜였기에 나누지 않고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갖기로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22:17-18)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모습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19:23-24). 당시의 유대인들은 머리에 쓰는 두건과 겉옷과 속옷, 허리띠와 신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네 명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한 깃씩 취했다는 것은 군사들이 각각 한 개씩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옷은 통으로 되었기에 나뉠 수가 없어서 제비 뽑아 한 사람이 취했습니다. 이는 시편 말씀과 같이 겉옷은 나뉘지만 속옷은 제비 뽑을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 근처에 앉아 지킨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종종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다시 살아서 내려온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붙였습니다.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27:37). 사도 요한은 마태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는 나사렛 예수 유대이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더라.”(19:19-20).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푯말을 붙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칭호는 메시야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부지중에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함으로 진리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푯말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찾아가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 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나의 쓸 것을 썼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것에 대하여 속으로 분노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푯말을 붙이게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변경하도록 요청했지만 빌라도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7:3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7:38).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못박히신 것은 이사야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있었음이라.”(53:12)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범죄자들과 같이 간주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반란 음모자 등과 같은 정치범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바라바와 함께 로마에 대한 반역을 꾀하고 살인을 한 자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이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27:39-40). 빌라도가 예수님의 푯말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을 써서 조롱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에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며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에, 사탄이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는 말로 유혹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사탄은 다시 찾아와 예수님이 고통당하실 때에 군중들을 통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신 것은,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에 이르신 것입니다.

 

지나가던 자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같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이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희롱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27:41-43).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남은 구원하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 자라고 회롱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 동안에 눈먼 자를 뜨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고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자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믿음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예수를 기뻐하시면 구원하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것은 사탄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사역의 현장에서 이러한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다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 십자가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을 섬기면서 찾아오는 상처와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을 섬기면서 찾아오는 낙심과 피곤함, 패배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이 찾아오면 우리의 내면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 소리는 주위에서 말하는 음성이 아니라, 나의 낙심된 마음에서 찾아오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자아에서 내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소리는 사탄이 주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낙심되고 피곤하고 지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며 죽어가실 때에 큰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었습니다. 사탄은 대제사장들과 군중들, 그리고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큰 수치와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이 세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속삭임과 군중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그 사역을 위해서 마지막 피 한방울을 흘리시고 계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고난 중에도 잠잠하신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22:6-8).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시기에 사람이 아니라 벌레와 같은 미천한 자로 느끼셨습니다. 사람들이 훼방하며 조롱하는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이 주님을 구원하실 것이라며 손가락질하며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고난과 조롱의 대가를 지불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거룩과 위엄을 지키셨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한 강도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했다고 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27:4). 그러나 욕하던 한 강도가 예수님의 고난당하시되 원망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주님을 메시야로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누가복음은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23:40-42). 그러자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4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한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난을 당하시고 있으셨습니다. 손과 발에 박힌 못으로 인하여 피가 흐르며 큰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몇 시간 후면 운명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 강도가 회개하자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셔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 당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우리 주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신 희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앞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고난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순교의 현장에서나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이겨내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보여주신 본에 대하여 ...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찾아오지만 주님이 고난 중에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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