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11) -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요일 3:1-10)

비전의 사람 2022. 6. 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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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11) -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요일 3:1-10)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족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에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을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이란 새롭게 태어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자녀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셔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되시도록 인도하시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죄를 멀리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신 후에 그들이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에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에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레위기는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0: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민 중에서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요한일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에 주님과 같이 우리도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구체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의를 행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임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일 3:1)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보라라는 표현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집중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랑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이 세상의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은 놀랍고, 깊고, 끝이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희생하신 크신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은 우리의 무가치한 사랑에도 꺼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서 온 사랑이며 우리의 어떠한 사랑보다 뛰어난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위대한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주셔서 모든 믿는 자를 그 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의로우시기에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하나님에게서 태어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이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라도 습관적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다면,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출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는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받게 됨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죄 없이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거하는 하나님의 씨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나는 것은 영적인 출생입니다. 이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어 새롭게 태어났기에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본성은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베드로후서는 신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우리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내재되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변화될 것이기에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가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장래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장래에 일어날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장래의 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5).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은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며, 예수님처럼 행동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8:2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과 같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같이 변화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천국에서 영화스러운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2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살아가게 될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변화되는 두 번째 의미는 우리는 순결한 성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아직 죄에게 굴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몸이 변화가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순결케 하셔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의 구원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닮아가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순결하게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장래에 주님과 같이 변화될 것이게, 우리는 지금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이 순결한 마음을 갖게 되기에, 우리는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순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확신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우리가 그분과 같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우리의 행실이 주님과 같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전 7: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거룩과 경건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분의 뜻에 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주님과 같이 깨끗하게 살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3. 죄는 불법이기에 깨끗한 삶을 선택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며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불법이란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는 자는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불법을 행함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며 반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불법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적하듯이, 불법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반역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없이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가 죄를 사랑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내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즉 죄 가운데 거하는 자는 아직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용서의 경험이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요한은 습관적인 죄의 근원을 사탄으로 보았기에, 죄를 짓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했다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사람들이 습관적인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죄가 삶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44절에서 죄와 마귀와 연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 마귀는 중상모략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하나님께 반역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마귀의 일은 불신과 의심, 우상 숭배와 교만과 위선과 증오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에게 속한 죄를 멸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새로 태어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출생했기에 죄를 반복하거나 습관적으로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출생은 우리가 전에 즐기던 죄를 미워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거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되고 삶에서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주님의 가르치심과 같이 아비 마귀와 같이 거짓을 행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들의 자녀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모든 사람은 두 가족 중의 한 곳에 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마귀의 자녀들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불의를 행하며 형제를 미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그의 영적인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사탄은 두 가족의 머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든지 마귀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는 아직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은 우리가 누구의 가족인가를 결정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아직 사탄의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심을 소망하며 우리가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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