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12)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요일 3:11-18)

비전의 사람 2022. 6. 2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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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12)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요일 3:11-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고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요한일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과 생명이 되십니다.

 

성막의 성소에 금촛대가 어두운 성막을 밝혔습니다. 금촛대는 감람유로 등불을 밝혀 항상 성소를 밝게 했습니다. 금촛대가 상징하는 것은 생명과 빛입니다. 금촛대는 에덴동산의 생명 나무와 같이 나무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심되는 줄기로 여섯 개의 가지가 뻗어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등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고 하시며 우리의 생명과 예수님과 함께 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금촛대는 등불로 어두움을 밝혔습니다. 이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빛이심을 상징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며 빛이십니다.

 

이와같이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낳은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를 향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낳은 자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낳으셨기에,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으로 강제하는 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라나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의 열매라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닮아가는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범하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생명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다시 하나님께 속한 자,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특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은 의를 행치 아니하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형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형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 3:11)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그들이 복음을 처음 들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을 때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삶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같이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의무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거하는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진실성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씨인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행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인의 미움과 살인을 통하여 악한 자인 사탄에게 속한 자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움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가인은 형제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태도를 보였고, 결국은 자신의 형제인 아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가져왔고, 같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희생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되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것을 보고 분노하며 화를 냈습니다. 가인의 행동은 그의 사탄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하여 마귀에게 속했다고 언급하면서, 12절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고 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가인의 영적인 아버지는 악한 자인 사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인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벨은 그의 형제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미움과 살인을 통하여 악한 자의 본성이란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던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벨의 의로움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불의한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열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적대감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다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결코 환영하거나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악한 자에게 속한 자들의 본성에는 의로운 자들을 향한 미움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미움의 본질은 죄성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망에 거하는 이유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 죄의 형벌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미움은 극한 감정적인 느낌입니다. 증오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증오나 미움은 살인을 향한 첫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하는 자의 태도를 갖게 됩니다. 증오하는 사람은 가인과 같이 잠재적인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미움은 살인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인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자는 아직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의 자녀들의 본성에는 사랑의 씨앗이 있어서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악한 자에게 속한 자는 미움과 증오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구원받은 자에게는 사랑과 용납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함과 동시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새생명으로 거듭난 자의 증거라고 요한일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은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직 사망에 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한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습관적으로 사랑함으로 구원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믿는 자에게만 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을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뿐 아니라 세상에 거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포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셨고, 온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구원받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2. 형제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요한일서 31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에 이로써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한 것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0:18). 예수 그리스도는 자원해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기에 그 분은 십자가에서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곤욕을 당하고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난을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입을 열지 아니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고난이 찾아오고 시련이 찾아와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형제 사랑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의 유대인 출신 의사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였기에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이때 콘펠드에게 중환자는 목숨을 연장하는 치료를 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그의 치료는 형식적이며 기계적이 되어가며 의사로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고 절망의 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코펠드 의사는 그리스도인인 다른 죄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 죄수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혹독한 수용소 내에 일종의 기독교 지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구원이 바로 그들의 기도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주님과 이웃에게 빚진 인생임을 알고 그때부터 최선을 다하여 환자들의 치료에 임하게 됩니다.

 

한번은 그가 장암에 걸린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수용소 병원의 규칙은 그를 살려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환자를 살리면 그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는 환자의 절망에 빠진 얼굴을 보면서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수용소 규칙을 어기고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수술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마취제를 놓은 후에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며 높은 열로 고통하는 그를 위하여 믿음의 간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를 간증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신 분임을 간증을 했습니다. 환자는 깊이 잠들기까지 의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다음날 그가 일어나 자신을 치료한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동료 환자가 콘펠드 의사의 운명을 알려주었습니다. 콘펠드가 병원에서 잠들었을 때에, 누군가가 침입해 그의 머리를 나무망치로 가격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린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콘펠드 의사는 죽었지만, 그의 간증은 죽지 않았습니다. 환자는 의사가 마지막으로 알려준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며,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았고 세상을 다니며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 의사로부터 생명을 얻고 그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바로 수용소 군도라는 소설로 노벨상을 수상 받은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소련의 양심이라는 칭호를 얻은 유명한 소설가였습니다. 그 사람의 회심은 유대인 의사가 자신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한 사람을 살리려한 숭고한 사랑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에,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마땅히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는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의 형제 사랑을 언급한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우리의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을 희생하는 행함이 있고 위선이 아닌 진실한 사랑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취미나 기질, 매너에 따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는 것처럼 그 사람을 보고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비록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것은 마치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대하시는 것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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