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교회를 거룩하게 하라(2) -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

비전의 사람 2022. 10. 1. 21:10
반응형

교회를 거룩하게 하라(2) -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시편 11편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1:3)라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터가 되는 기초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터라고 하는 것은 근본 또는 기초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생을 살게 하는 세 가지를 든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인생이 무너집니다. 둘째, 성품입니다. 성품 또는 인격이 무너지는 것은 모든 관계가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건강입니다. 건강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면 인생이 주 안에서 부요한 삶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믿음과 성품, 건강을 희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일은 쾌락이나 물질을 위해서 더 나은 가치인 믿음과 성품, 건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사도 바울이 언급한 집은 돌로 지은 성전이나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교회는 바로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세우시는 지체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교회가 진리 안에서 세워지는 성경적인 원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구약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성경을 기록할 때도 방대한 구약의 말씀을 배경으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씀에서도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를 담아 기록했습니다.

 

구약의 성막을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기초를 두 가지로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성막의 울타리는 놋받침을 사용하게 하셨고, 성소와 지성소의 성막은 은받침을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성막의 규모는 가로 50m, 세로 25m 의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은 북쪽과 남쪽 벽이 각각 15m, 서쪽 벽이 5m 규모였습니다.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의 벽은 50 Kg 이나 되는 은받침 100개를 사용하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세워지고 있기에 교회의 참된 반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받침 위에 세워진 성막을 비유하시며 교회가 반석 위에 세워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헤롯 시대의 성전은 거대한 반석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막이 은받침 위에 세워졌듯이, 교회는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구약에서 은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명의 값으로 지불한 속죄를 의미했습니다. 출애굽기는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30:12-13)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내는 세겔은 은세겔로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믿음의 증거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이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4-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드리심으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속전은 생명의 값으로 드리는 값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루셔서 구원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는 은받침대 위에 세워졌듯이,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21:28)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받아 구원받은 성도들로 인하여 세워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인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루디아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감옥의 간수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음으로 인하여 교회에 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같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는 세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주님께서 세워가십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세워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여 침례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통하여 영혼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제자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신실하게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교회는 예수님의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성막이 은받침이라는 속죄의 기초 위에 세워졌듯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예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기에 그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는 내리고 그 분을 통해서 자라가야 한는 것입니다.

 

성막은 튼튼한 은받침 위에 조각목에 금을 씌운 널판을 연결하여 벽을 만들었습니다. 널판의 높이는 약 5m 였고 넓이는 75cm 였습니다. 널판을 100개를 만들어 은받침에 연결하여 성소와 지성소의 성막 또는 회막의 기둥과 터가 되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막을 비유로 교회의 기둥과 터에 대하여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터가 흔들리면 집이 무너지듯이, 터와 기둥은 건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터와 기둥이 없다면 그 건물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그냥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7:24). 우리가 지켜야 할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의미는 교회가 진정으로 세워지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잘 지켜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교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며 마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수염소 우상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닌, 자신들이 만든 성전에서 송아지나 염소의 우상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분향하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진리를 떠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며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에서의 배교는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예배를 받으시고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떠나기 시작한 것은 골로새서와 요한일서에서의 가르침과 같이 초대 교회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가장 큰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성육신에 대한 부인이었습니다. 요한2서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2 7)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진리를 떠난 다른 교리는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1:9)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3:10)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성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시다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선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왜곡하기 위하여 모조품 교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조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이 의식과 율법으로 사람들을 종교화화는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콘스탄틴누스 황제가 약 300년 경에 교회와 국가가 연합하는 카톨릭을 만들면서 모조품 교회의 형태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그러한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서 행위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경우가 침례를 세례로 변경하였고, 세례와 같은 의식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변경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변경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중보자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기도하여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도 가르쳤습니다. 마리아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구원받아야 할 영혼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는 죄가 없이 태어났다는 가르침으로 마리아를 우상화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씻음 받는 것이 아니라, 신부에게 찾아가서 고해성서를 함으로 죄를 용서받는 의식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진리에서 세워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 직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목회자를 통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단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함으로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의 두 직분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교회의 리더십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세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성경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권위는 성경보다 전통이나 교황의 가르침을 우선시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속한 나라이기에 국가와의 분리를 믿습니다. 교회가 국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아야 하고, 국가도 교회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이 있음을 믿습니다. 침례와 주의 만찬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거룩하고 세상과 구별된 교회를 지켜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님들께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으로 함께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1:27-28).

 

교회의 비밀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며 함께 하시듯이, 교회의 지체 안에도 주님이 거하셔서 영광의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막의 울타리는 놋받침위에 조각목으로 만든 기둥을 세웠습니다. 놋받침은 60개의 기둥을 지탱하기 위하여 60개의 놋으로 만든 받침으로 지탱했습니다. 울타리의 규모는 동서로는 100 규빗으로 약 50m 정도였고, 남북으로는 50규빗으로 25m 정도였습니다. 울타리를 만들기 위하여 총 60개의 기둥이 사용되었고 동시에 놋받침도 60개를 사용했습니다. 조각목으로 만든 기둥은 놋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울타리는 하얀 세마포로 둘러서 바깥에서 안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출애굽기 27장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쪽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27:9-11).

 

울타리를 위하여 기둥의 받침은 은이 아니라 놋을 사용했습니다. 놋이 상징하는 것은 견고한 힘을 상징합니다. 외부의 울타리는 거친 바람을 견뎌야 했기에 견고한 받침으로 성막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놋 또는 동으로 만든 받침을 사용하여 기둥을 지탱했습니다. 놋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신 성품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이나 고난을 이기는 강함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모든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강한 힘이 있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다 넘어지고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시고 살이 떨어져 나가셨고, 사랑하던 제자들이 배신하고 떠나가도 실망하지 않으시는 견고함이 그분의 성품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심과 같이 성령 안에서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3:16)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찾아오는 시련과 역경, 그리고 환경의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강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으로 입혔습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로서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싯딤 나무는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였습니다. 거친 환경을 극복하고 광야 가운데 우뚝선 싯딤나무인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거친 세상에서 사셨지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성막을 위하여 조각목에 금을 씌운 것은 신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성막의 울타리를 위하여 놋을 입힌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시고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싯딤나무가 광야에서 자라 귀하게 하나님의 성막의 재료로 사용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방황하다 주님안에서 구원받고 주님의 성전인 교회의 지체로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조각목의 기둥은 세마포를 연결하여 전체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세마포는 하얀색으로서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서 그곳은 금으로 입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의 밖에서는 하얀 세마포로 둘러싸인 성막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으시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거친 광야의 환경에서 하얀 세마포로 둘러싸인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시고 겸손하신 인격을 보여지듯이, 세상에서 교회를 바라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시고 겸손하신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 아래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겸손함을 드러내는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로서 생명이 하나이듯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는 주님과 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명이 살아있는 참된 교회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격과 겸손함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주제로 거룩한 교회가 되라는 시리즈 설교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지속적으로 세워지도록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