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8) -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엡 2:11-18).

비전의 사람 2023. 5. 1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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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8) -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2:11-1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2:1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영적인 연합입니다. 즉 영적으로 하나되는 통일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겪고 있는 갈등에 대하여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통하여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랑이 있지만 동시에 미움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있지만 원수됨도 존재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사람들의 관계는 항상 깨어지고 나누어지는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죽도록 미워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의 갈등도 심각하여 야곱은 살기 위하여 멀리 도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한 레위인의 가정 문제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베냐민 지파가 분리되어 싸우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랑으로 연합하여 주님의 영광이 되어야 했지만, 실상은 초대 교회 안에 수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갈등과 분열의 아픔을 겪는 상황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서신을 통하여 두 사람의 화합을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2). 사도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여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는 이방 지역인 안디옥이나 데살로니가, 그리고 에베소와 로마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각 지역에 있는 교회에 소속되어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교회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들은 민족적으로 서로에 대한 반감이 있어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모세의 시대로부터 율법적으로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인이 숭배하던 우상으로부터 멀리해야 했고, 그들의 타락한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위하여 이방인과 차별된 음식을 먹고, 이방인과 차별된 예배를 드리며, 이방인과 차별된 율법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방인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면서 스스로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하여 유대인들은 개처럼 무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부정한 자로 여겨 멸시했듯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함으로 원수됨의 깊은 골이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의 최고점은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육백만 명이나 죽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에는 큰 계곡이 있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배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함께 예배드리거나 식사를 하는 것이 서로 어색하거나 주저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의 모든 교회들에서 이러한 갈등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교회의 본질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서도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라고 권고했습니다.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를 마음으로 영접하여 하나됨을 이루어 주님의 영광이 되라는 권면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벽을 허물고 화평을 누리며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서신서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1세기의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화평의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이방인들은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 육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제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2:11).

 

에베소는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아시아 주의 수도였고, 인구는 50만 정도였습니다. 항구를 중심으로 이룬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에베소는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성한 도시였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도덕적 타락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베소는 고대 로마와 같이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도시 중심에는 거대한 성매매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고, 거대한 아데미 신전에는 수종드는 여사제들이 아데미 여신을 위한 종교의식으로 신전에 찾아오는 남성들과 성적인 교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녀간의 교합이 다신의 신을 자극하여 풍요를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숭배하던 아데미(다이아나)는 다신을 상징하는 신으로 그리스인들이 제우스의 딸인 다이아나로 숭배하던 여신이었습니다. 에베소의 중심에는 아데미 여신을 위한 거대한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으며 축구 경기장 면적을 대리석을 이용해 터를 만들었고, 그 위에 높이 20 m 정도의 대리석 기동 127개를 세워 신전 지붕을 지탱했다고 합니다. 에베소의 사람들은 아데미를 숭배하러 오늘 사람들에게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주요 수입원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자신들의 우상으로 얻던 수입원에 위협을 느끼자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에베소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에베소에서 복음을 3년간 전하자 큰 부흥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수가 이방인들로서 전에는 하나님 대신에 아데미 여신을 숭배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기 전에 소망없니 살아가던 멸망의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을 행하며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자로 살아가던 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거의 삶을 생각할수록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 가운데 살아왔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누구였는가를 살펴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1-12).

 

이방인들은 전에는 이방인으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서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할례당이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상징하는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습니다. 무할례당이란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을 지칭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감을 두어야 하는 이방인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도 아무런 권한이 없는 외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며 소망이 없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약속의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참여함으로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갔기에 우상을 숭배하며 현실에 만족하며 소망없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진노의 자녀로 살아왔기에 아무런 소망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사도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전에는 멀리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것을 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전에는 원수였지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써 온 인류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2:14).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사이를 가로막는 큰 담을 무너트리셨습니다. 그 담은 아브라함 시대 이후부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 막았던 큰 담이었던 것입니다.

 

헤롯 성전에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담벽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바깥뜰이라고 불리우는 이방인 뜰이라는 곳을 넘어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유대인들은 안뜰이라고 불리운 이방인들이 갈 수 없는 성전의 뜰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담에는 이곳을 침범하는 이방인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주님의 역사를 성전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담벽을 유추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는 담은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 (2:14-15).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기준인 율법에 대하여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지키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 갔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역사적으로 율법과 관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를 향하여 담을 쌓고 서로 용납하지 않고 원수와 같이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하나되지 못하고 마음의 벽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서로의 관계를 막는 막힌 담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무셔서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화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육체로 의문에 속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으로 더 이상 율법이 사람들에게 의를 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셔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폐하신 율법은 율법의 제사법과 절기, 그리고 의식적인 법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과 같은 율법의 도덕법은 신약에서도 동일한 말씀으로 가르치며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번제와 화목제와 같은 제사법과 절기, 그리고 음식 중에서도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모두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는 원수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단번에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심으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서로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6-17). 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게 하는 율법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심으로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정죄하고 비방하던 율법이 폐하여졌기에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하여 정죄하거나 싸울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이 주는 평안을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시며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향한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평안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비난하게 함으로 관계를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서로의 담을 허물고 화평과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막힌 담이 있다면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1-4). 우리의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됨을 위하여 우리는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되었습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의 담을 허물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에 서로의 마음을 막히게 하는 모든 장애가 사라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화목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화평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2:16).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기를 기뻐하셨지만 죄가 그 화목을 깨트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희생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죄가 모두 씻음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셔서 아들로 삼으셨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들이 서로 화목하며, 그 화목함으로 하나님께 화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7-18). 예수님께서는 먼데 있는 자와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먼데 있는 자란 이방인을 지칭하며 가까운데 있는 자들이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평안을 전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평안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분의 몸된 교회에서 지체들과 참된 평안을 누리며, 동시에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게 했던 죄를 씻어짐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참된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희생의 제사를 일부는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제육은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이 함께 거룩한 곳에서 먹으며 교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화목제물을 받으심으로 예배자와 평화를 얻게 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희생 제물을 먹으며 서로 교제하며 화평을 얻게 하셨습니다. 성도간의 화평은 성경이 가르치는 소중한 교훈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 주님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이 나면, 예물을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와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팔복 중의 하나가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자는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지체들이나 가족과 화평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과 한 몸이 되어 화평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화목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평화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는 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또는 교회에서 다투며 화목을 깨는 자인지, 아니면 화목케 하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전달하는 자인지 자신을 투명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랑과 용납을 통하여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서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하나가 되어 그 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한 평안의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와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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