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에베소서 강해(20) -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21)

비전의 사람 2023. 9. 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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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20) - 성령으로 충만하라(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부름에 합당한 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겸손하게 행하거나 교회와 하나됨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랑과 지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열매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지 않는 자는 성령으로 인한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1. 성령 충만하는 삶은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8).

 

성령으로 충만받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받는 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황홀경을 경험한 것을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그러한 모습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고 했습니다. 술 취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고대 시대의 이방인들은 술에 취하는 목적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교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술에 취할수록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자신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교통하는 의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의 배후는 물론 사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본받아 술에 취하지 말고, 도리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충만함을 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여 주께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이며, 하나님게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신실하게 예배하게 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타락한 음악과 춤과, 술이나 마약을 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세상 신을 찬양합니다. 술에 취하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이와같이 완전히 반대되는 삶아가게 합니다.

 

사도 행전 2장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하자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 언어로 말을 하자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라했습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7-8). 그들에게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며 새 술이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2:13).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술에 취하여 종교 의식을 하는 것에 빗대어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을 말한 것을 새술에 취했다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술에 취하여 외국어인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라고 한 것은 오순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염두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충만 받거나 충만 받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성령 충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으로 충만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구원받으면 하나님이 그 분의 영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주하십니다. 마치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듯이, 우리의 몸을 성전 삼으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거주하십니다. 로마서 8장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기에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성령 침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중에 타락하여 음행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성령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그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비록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 음행을 하며 죄를 범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을 근심되게 하며 소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이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은 거룩한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근심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 소멸하지 말고 도리어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성령으로 충만받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받으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받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삶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의 비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사도 행전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6: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며 그를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순교의 고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시간, 그리고 재능과 지성을 성령님께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한 것은 날마다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순종하며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로서, 주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이 풍성하게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찬양의 은혜를 누리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하기 위하여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5:18)라고 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바가 아닙니다. 고대의 이방 종교에서는 술에 취하여 우상의 영인 사탄과 교통하려는 종교적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에 가서 술에 취하게 되고 술에 취한 채로 신전의 창녀들과 간음을 함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자가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사회의 죄악된 풍속과 우상 숭배를 단절하게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와 사회 생활, 경제와 정치적인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화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되면 이러한 방탕한 삶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3-4). 초대 시대에서 이방의 거짓 종교의 틀에서는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우상 숭배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되면 세상의 우상 숭배와 음란과 술 취함과 방탕을 버리게 됨으로 다시는 그들과 함께 극한 방탕의 삶을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상히 여겨 비방하며 핍박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중의 일부가 우상 숭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우상 숭배하는 일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특히 우상 숭배하는 일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는 우상 숭배의 의식에서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고전 10:20-21). 우상 숭배는 사탄과 교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1절에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전한 것은 일부 사람들이 이방인의 우상 숭배의 의식을 교회에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 주의 만찬을 하면서 먼저 만찬을 먹으며 취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방 제사의 의식을 가져오려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와 헬라 문화에서 숭배하는 신 중의 하나가 디오니소스 였습니다. 특히 에베소에는 디오니소스라는 술의 신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제사할 때에 사람들은 술에 취하여 춤을 추며 음행하는 방탕함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술에 취하여 음행을 하면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몸에 들어와 영향력을 끼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디오니스소라는 신이 아니라 마귀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디오니소스가 자신에게 들어오게 하려는 이유는 그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우상에게 드리기 위하여 술과 음란한 생활로 방탕함에 자신의 몸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은 자신의 몸을 음란과 술의 방탕함에 드려 우상 숭배를 하던 시절에서 단절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까지 술취하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의 포도주는 현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시대에는 포도주는 불에 데워서 알콜 성분이 사라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잼과 같이 만들어 가죽 부대에 보관했다가, 마실 때에 물에 섟어서 마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와같이 포도주가 필요했던 이유는 물을 마시면 배가 아픈 경우가 있어서 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물은 우기에 돌 웅덩이에 받았다가 건기에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시는 물과 같이 신선한 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여있던 물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물을 마실 때에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물에 포도주를 섟으면 물에 있는 박테리아가 죽어 건강한 물이나 대체 음료로 마실 수가 있었습니다. 즉 물에 포도주를 섟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거나 대체 음료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에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게 하신 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물로 섟은 포도주로서 정상적인 과정으로 나왔음을 인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님께서는 불에 데워서 포도주의 진액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알코올을 제거하지 않고 마시는 포도주가 있었는데, 이런 포도주는 취하게 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금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포도주는 현재의 알콜 성분이 있는 포도주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제사장들에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10:8-10).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져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해야 했습니다. 잠언서는 포도주를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24:31).

 

에베소서는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여 온갖 죄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이방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하게 됩니다. 즉 그는 술에 취하여 방탕하게 살아간 것입니다. 그의 형제는 말하기를 그가 창녀와 함께 하나님의 살림을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즉 탕자는 술과 창녀에 빠져 방탕하게 지냈던 것입니다.

 

3. 성령 충만한 삶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7:37-38)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7:37-3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면서 은혜의 생수가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즉 우리가 성령의 충만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삶에서 살아가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기쁨이 흘러 넘치면서 찬양이 입에서 나오게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5:19). 찬양은 우리의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찬양을 진심으로 기쁨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할레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찌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149:1-3).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를 양육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직장에서 순종하며 성실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황홀경에 빠지거나 모르는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에서 우리의 삶은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에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삶은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고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6-17). 성령 충만한 삶은 이와같이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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