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음에 쉼을 주시는 주님의 초청

비전의 사람 2023. 11. 2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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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쉼을 주시는 주님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집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항상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5:7)라고 했습니다. 즉 인생은 불티가 위로 올라가듯이, 고난은 모든 인생이 자연스럽게 겪어야 할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이 세상에서의 낙원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낙원과 같은 천국은 주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대처하며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을 이기며 대처하기 위한 성경적인 원리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인생의 여정에는 고난이라는 여행 가방을 메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우리의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어떠한 종착지를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 챙겨야 하는 필수품이 바로 배낭입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야 하는데, 그 배냥에는 필요한 물과 식량, 여분의 옷들로 가득합니다.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챙겨야 하는 것은 여행 가방입니다. 여행 가방 안에는 며칠간 필요한 필수품을 챙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끌고 가거나 매고 다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가방을 메고 다닙니다. 비록 가방이 무겁거나 거추장스러워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등산이나 여행은 빈 몸으로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도 혼자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과거에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혼자 가서 일하고 가정의 필요를 채웠지만, 이제는 아내와 엄마도 사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무거운 가방을 챙겨야 하듯이, 우리는 가족을 챙겨야 합니다. 페북에서 한 목사님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자신은 자녀들이 많아서 교회의 사례비로는 살 수 없엇 자신도 일하고 사모님도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목회도 무거운데 가정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일을 하니 삶의 무게가 더욱 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족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하고 소명이기도 하기에 자신을 희생하며 챙겨서 함께 여행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주신 또 다른 가족은 영적인 가족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위로와 격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전쟁을 치루곤 합니다. 경제적인 전쟁을 치루기도 하고 건강과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때로는 영적인 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전쟁을 치루든 간에 그 안에 찾아오는 패키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의 의미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삶에서 이기기 힘든 시련으로 인하여 육체와 정신이 큰 아픔을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좋은 사람이라도 인생에서 찾아오는 고난을 피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일명 자연인들입니다. 어찌 보면 얼마나 힘들면 산에서 혼자 살아가느냐고 하며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포에서 국회위원 후보로 지난 17년간 도전하신 배종호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미국의 특파원 기자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에 갑자가 찾아온 고난은 그 분의 삶을 흔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분의 아들이 엄마와 누나와 함께 수영장에서 수영하다 갑자기 익사로 사고사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막내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큰 슬픔과 절망으로 다가왔고 거의 폐인 직전까지 가면서 가정이 붕괴되는 위기까지 갔다고 합니다. 함께 살아가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분은 폐인이 될 정도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배종호 교수님은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시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미국의 리버티 신학교에서 상담학을 공부하시다가 구원의 확신까지 얻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 분을 다시 회복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가장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신 주님은 배종호 교수님의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게 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도전하는 소명을 받아 열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으로 인한 고난이 찾아오곤 합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과 같은 질병은 삶을 무너트릴 수 있는 무서운 고난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고난이 찾아와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경제의 어려움은 마음을 낙심시키고 절망시킵니다. 사업이 갑작스럽게 어려워지거나 부도가 나기도 합니다. 관계에서 찾아오는 고통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는 코로나 이후로 무척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찾아오는 무거운 짐은 장년들이나 주부들의 마음과 어깨를 무겁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욥도 큰 고난 가운데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낙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도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7:15-16). 욥은 자신이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낳다고 호소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질 절도록 인생의 구렁텅이로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살에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살에 구더기가 보인 이유는 피부에 고름이 흐르고 피부가 썫어 충과 같은 벌레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9:17-18). 즉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풍으로 치시고 많은 상처를 주시며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괴로움이 가득하게 하신다고 원망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했습니다.

 

욥이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 즉 자녀들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 모든 경제력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경제적인 파산, 그리고 아내와 친구들의 정죄 등으로 인하여 자신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절망하며 아파하는 고난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주님앞에 선다면 어떠한 짐을 주님께 맡겨 달라고 부탁하실 건가요?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 작은 고난으로 인하여 신음하고 아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부끄러워 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이해와 대처를 지혜롭게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우리는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견뎌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11:28-29).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주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하셨습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2:6-7). 하나님께서는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도 아십니다. 하물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의로운 욥에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욥보다 더 사랑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어떤 사람은 고난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확성기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역의 과정에서 사도 바울은 심한 고생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결국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도록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욥과 같이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난의 밤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분을 붙들며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난 속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며 고난의 터널을 견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며 그 입을 열지 않으셨던 이유는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셨기 때문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에서 예언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3:11)라는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당황하거나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난으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인 고난을 스스로 이겨보려고 했지만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게 간절히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그의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강하여 주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함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통로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난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운동 선수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수한 선수가 되고, 등산가가 피와 땀의 노력으로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훈련과 연단이라는 고난 없이는 영적인 성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수고와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해한다면 그 고난을 아름다운 간증으로 승화하는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시간에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3. 우리는 고난의 열매가 선하기에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3-5).

 

성경은 고난 자체를 칭송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불같이 찾아오는 시련과 역경을 피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시험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맛은 쓰지만 고난의 열매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추수하기 위하여 논과 밭에서 땀을 흘려야 하고,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바다에서 그물을 내리고 올리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고, 운동 선수가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난의 현장을 마주해야 하고, 그 고난을 우리는 피하지 말고 이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우리를 향하여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로 인하여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성숙시켜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실패이기도 하고, 고난은 우리의 좌절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역경이기도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외로움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역경이 우리에게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믿음으로 인내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성숙하게 하시고 쓰임받는 주의 일군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고 자신의 자아대로 행했지만, 고난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다윗의 고난은 다윗이 주의 말씀을 지키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통하여 찾아오는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간증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욥의 믿음을 정금같이 빚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시련을 아셨고 어떠한 고통을 당하는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욥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의 무게를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신이 가는 길을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단련하신 후에는 자신이 정금같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단련은 정금을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불속에서 제련하여 불순물을 사라지게 하여 정금을 만들게 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욥은 자신을 단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의 환경이나 시련이 우연히 욥에게 고난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욥을 단련하셔서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욥은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욥이 연단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을 축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42:12, 16). 욥이 살아온 백 사십년의 인생에서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골짜기에서 더욱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그릇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으로 인하여 아프고 힘들고 지치기도 합니다. 고난을 묵상하면 낙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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