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라 (고전 1:18-25).

비전의 사람 2024. 6. 1. 21:22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라 (고전 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뿌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전달되었습니다. 믿는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지칭하다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군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사형틀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어야 하는 희생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원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하고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한 참된 의미를 우리가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십자가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1. 십자가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십자가는 온 세상의 희망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이후에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자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절망과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에덴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의 의미는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은 후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께서 우리가 범한 죄의 대가를 피를 흘리신 생명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죄를 범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친히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종교 생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으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가 참된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며 오직 육신의 생명이 참된 생명인 줄 알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자였습니다. 즉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생명인 영생을 회복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을 회복하셨을 뿐 아니라, 잃어버렸던 우리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던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의인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1:13-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어두움의 권세에 갇혀 살아가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짐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3: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순종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자기를 비워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라 하시니라.”(6:39).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온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죽음으로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로마 시대에 가장 잔혹하게 처형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가장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그만큼 중한 형벌을 요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구약 시대의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법에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양이나 염소의 각을 뜬 후에 제물로 드리고 그 피를 단 위에 뿌림으로 가능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한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는 피를 통하여 씻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며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시작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셨고, 그 분의 순종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복을 받은 자로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강포한 죄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로 인류의 역사는 분쟁과 전쟁으로 탐욕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다시 잃어버린 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을 얻은 자들이 교회로 모여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복과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순종하지 않았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신에는 교만과 반항과 죄에 대한 욕구가 가득하여 우리를 불순종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태어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시는 새로운 성품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순종하심과 같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 분이 하시고자 하시는 뜻에 동참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따르시며 순종하셨듯이, 우리는 주님을 따르며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6: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통하여 사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이 다스리시며 쓰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자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되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자기 부인이며 자기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가치는 이 시대의 철학과 맞지 않는 반사회적입니다. 이 시대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아 실현을 요구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권세를 쌓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지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순종이었듯이, 우리가 지는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고난과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순종이 주는 열매는 하나님의 기쁨이여 영원한 상급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3. 십자가는 관계를 회복하는 화평의 메시지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3-16).

 

십자가는 화평의 메시지입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하는 악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죄가 아담의 가정에 들어오면서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원망하면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미움이 커져 살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관영하면서 사랑해야 할 관계는 서로 경쟁하거나 이겨야 하는 관계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과 민족들이 서로 반목하다가 전쟁으로 상대를 무너트리려 했습니다. 진 나라는 이긴 나라의 종이 되어 노예로 팔려가거나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힘있는 자는 더 큰 힘을 얻기 위하여 나라를 확장하기 시작하다가 거대한 제국을 세우곤 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는 삐뚤어진 관계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현재 삼년째 이어지면서 약 측에 수십 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격속에 죽어가고 잇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가자 지구에 수많은 사망자를 내며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과 다툼의 뿌리에는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정욕과 욕심의 뿌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스릴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간 다스릴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그 분은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9: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은 더 이상 전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고 서로 화목하며 자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화평의 왕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은 물과 기름과 같이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였기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온 이스라엘 자손이나 이방인들은 율법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로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폐하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은혜는 같은 믿음 안에 있는 지체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난 1500년간 유대인과 이방인들과 원수되었던 것을 다시 화평하게 했습니다. 이와같이 복음은 강력한 화평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은 복음으로 세상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이 하나가 되어 화평을 누립니다. 이제 세상을 향한 우리의 메시지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화평을 주기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화평의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가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혹시 지체들간에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관계가 회복되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비결은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삶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2-3).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화평의 사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과 온유한 자가 되어 사랑으로 서로 용납함으로 평화의 관계를 세워갈 때에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사명을 다시 회복하여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회복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화평은 우리의 속 사람의 화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