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기는 삶을 살아가라 III

비전의 사람 2024. 6. 29. 14:48

이기는 삶을 살아가라 III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우리는 이기는 삶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영역으로 죄와 세상, 그리고 사탄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중립적이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할 또 다른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아입니다.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아를 이기는 삶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내가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역설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7:15)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이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러한 악을 행하게 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7:24)고 탄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내 속에 거하는 죄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복음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가 이겨야 할 죄의 본성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도록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타락한 육신에게서 나오는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아를 이해할 때에 두 가지 측면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흘러나오는 사랑과 은혜의 선한 마음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이 육신 안에 함께 거하기 때문에 죄의 영향으로 깨어진 자아가 있습니다. 깨어진 자아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은 죄의 욕심과 타락한 성품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즉 자아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자신 안에 일어나는 욕구와 무관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잠재된 자아 의식을 인정하지 말고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선 수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을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라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의 의로 아무리 열심히 종교 활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시기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관점을 새롭게 한다면 자신의 욕구와 상황, 감정과는 무관하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자아와 욕구와는 무관하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이기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출발점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할 자아는 무엇인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자신안에 내재된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2:3-4).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가 오직 자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우선인 경우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삶에서 우선순위가 된다면 오직 자신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신 그 삶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의 존재와 필요를 무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프면 자신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건강이 회복되어야 일터로 나갈 수 있고 배가 불러야 힘있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몸이 피곤하면 쉬어야 재충전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부르고 건강하고, 재충전하여 활력있는 내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크고 더 멋진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의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내재된 이기심을 버리는 것은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가르치신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부인한 후에야 우리는 더 위대한 가치인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과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우선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주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섬김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기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자아는 자신이 항상 우선 순위가 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을 우선 순위가 되도록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을 때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피하여 지나 간 것은 어찌보면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함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는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어 그 사람을 돌보아 주도록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르치시며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실을 칭찬하셨습니다.

 

이기심을 버리는 삶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2:3-4). 이기심은 다툼과 허영심을 불러옵니다. 다투는 삶은 모두가 이기심이 가득한 마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섬기는 삶을 배워가는 환경은 교회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의 가치를 배울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여러 지체들이 함께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어려운 지체들을 심방하거나 병원을 심방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물질이 필요한 지체들을 위해서 사랑의 헌금을 통하여 돌아봅니다. 교회에서 국내외 선교사역을 위해서 귀한 물질을 보내드리며 후원하는 것은 우리가 선교적인 교회를 향해 희생하는 모습입니다.

 

지난 번에 한 목사님께서 폐암으로 투병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 자매님께서 귀한 물질을 사랑의 헌금으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카페에서는 섬기는 사역을 통하여 교회 건축 헌금과 단기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카페의 필요를 위해서 한 자매님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세대별 목자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며 지체들을 세우기 위한 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희생을 실천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함께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는 내면의 정욕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우리의 자아에는 정욕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정욕이란 영어로 desire 또는 lust 라고 합니다. 이는 마음에 강하게 일어나는 욕구인데, 성경에는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욕구를 의미합니다. 즉 육체를 향한 강한 성적 욕구나 소유나 인정에 대한 강한 집착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정욕이 가져다 주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욕심은 죄에 이끌리는 정욕입니다. 이러한 금지된 정욕에 이끌리면 시험을 받게 되고,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가면 사망을 낳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죄의 뿌리에는 죄의 욕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욕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욕대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1:18-19). 유다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에 관하여 그들은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우리 안에 내재된 정욕을 통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죄의 길로 유혹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트리고 믿음을 약하게 한 후에,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연약함이 있기에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필요가 탐욕이 되게 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어 죄의 길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필요가 육체의 욕심이 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필요가 있지만 사탄은 우리에게 육체의 필요를 넘어 욕심을 추구하게 하는 탐욕으로 죄의 길로 인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모든 과실을 먹어 육체의 필요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 열매를 바라보고 유혹을 받아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만나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지만, 그들은 고기에 대한 욕구를 가지며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요구에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지만, 그들의 탐욕 때문에 큰 재앙이 임하게 하셨습니다.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11:33-34).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원망한 것은 정욕이 그들의 믿음을 이긴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탐욕을 품었기에 그들이 선 곳이 탐욕의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육체의 탐욕에 빠지면 죄를 범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사탄이 친구처럼 찾아와 그들을 속여 자신의 영향력 안에 가두어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첫 열매로 구별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구별하신 것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아간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옷과 금과 은에 탐욕을 품고 자신의 장막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죄는 자신의 삶을 무너트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에도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삶에서 독배처럼 조심해야 할 것은 음행의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음행은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의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게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7-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갑니다. 거룩한 성전이 음행으로 더럽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범합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음행을 멀리하고 자신을 지켜 거룩에 이르러야 합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는 다윗이 왕궁 옥상에서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정욕을 품게 되는 이야기를 설명합니다. 다윗은 그녀를 불러다가 결국 동침하게 되고, 결국 밧세바는 임신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으려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한 말씀과 같이, 다윗은 자신의 성적인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죄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그의 집안에 큰 화를 겪는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인 들릴라와 불법적인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의 마음에 세상에 대한 정욕이 싹이 트면서 이방 여인을 사모하다가 결국 그의 삶이 무너지면서 비참하게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간 후에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감옥에 갇히게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은 결국 애굽의 총리에 오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어하라는 의미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 9, 1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마음에 새기면,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켜 세상의 썩어질 것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피하기 위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자아를 이기는 비결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재된 이기심과 금지된 정욕에 대한 탐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로서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게 됨으로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음으로 날마다 이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