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리즈(2) - 우리가 배워야 할 십자가의 길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7-8).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곳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십자가는 십자가라는 형상이 아니라, 그곳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길은 고난이 길이며 더 나아가 죽음의 길이지만, 그 분은 십자가의 길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순종함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원리를 빌립보서 2장 말씀을 통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비우는 종의 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7).
십자가의 길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 가던 길이었습니다. 당시에 로마에서 가장 무거운 죄를 진 사람들에게 내리던 형벌이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고 무서운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길을 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모두 내려놓으셔야 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위해서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자신의 지위와 특권, 생명까지도 포기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비우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목사이며 사회사업가인 조지 뮬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함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년에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하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뮬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즉 평판, 선택, 좋은 것 과 싫은 것, 원망 등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인생이 저도 모르게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가 크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을 따르는 시작은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자신을 비워서 종의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하여 자신을 비울수가 있습니다.
1)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5-6).
탐심은 마음의 욕심을 의미합니다. 탐심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여리고 성의 의복과 금을 탈취하여 숨겼습니다. 그의 탐심은 그의 삶에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은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배우며 세상의 길로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그 분을 섬기는 삶으로 인하여 인생의 행복을 누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정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정욕은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는 욕구입니다. 정욕적인 삶은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정욕적인 삶은 현실에 안주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욕을 따르다가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을 사랑하여 주님을 배반하였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선교 여행을 포기하고 뒤돌아 갔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에 빠져서 주님의 뜻을 저버리게 유혹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은혜아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아중심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5).
우리는 자기 중심의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자기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 그리스도가 마음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비우게 될 때에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붙들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에 주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갖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길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셨고, 사람의 모습에서 가장 섬기는 자인 종의 모습으로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시는 겸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주님의 형상입니다.
리더의 진정한 모습은 서번트, 즉 종의 모습입니다. 서번 리더십이란 종의 모습으로 상대를 섬기며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자신을 낮추어 겸손의 모습으로 섬겨야 합니다. 겸손이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자신을 낮추어 주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그림을 구경하러오는 사람들로 인해 코펜하겐은 늘 붐비게 되었습니다. 한 유명한 화가도 그 초상화를 보기 위해 코펜하겐을 방문했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그는 그 그림을 면밀히 조사해보았으나 그림의 기법이나 색채감이 별로 특별하지도 않아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함께 온 친구에게 그가 느낀 소감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여보게. 그것은 자네가 잘못 본 걸세. 그 그림은 마주서서 보는 것이 아닐세. 어떻게 우리가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겠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시 보게. 그러면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될 걸세”라고 충고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그 그림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동된 화가는 언제까지나 그 그림을 황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신앙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겸손의 표본이신 주님을 낮아지지 않은 세상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을때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와 교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길은 죽기까지 따르는 순종의 길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은, 죽기까지 순종하시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믿음의 삶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동성애자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왜곡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으로 스스로 합리화 하려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힘든 순간에도 이 길을 계속 가야만 하는 순종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역의 길을 가면서 힘들고 지쳐 있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계속 가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안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갑자기 생긴 암으로 인하여 수술을 하시고 뒤돌아 보시며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며 주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고난의 길이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기도 합니다.
리이튼 포드라는 지금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간증했습니다. 그가 서부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비행기에 기름을 넣기 위하여 잠시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찾아와 교제를 나누었답니다. 그 선교사가 자신은 모슬렘지역에서 10년 동안을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하자, 리이튼 포드 목사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심자가 있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두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십년 선교활동 중에 2명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시 일행중 한사람이 불쑥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매우 놀란듯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리이튼 포드 목사는 공항에서의 그 경험을 자신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사역의 열매가 단 2명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두셨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고,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그 선교사의 대답에 이 목사님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버티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4.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길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1).
십자가의 길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배우며 따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인임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주라는 말은 Lord입니다. 이는 최고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제국에서는 황제이며, 군에서는 사령관이며,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권위자를 두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주인을 자아로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생각, 의지가 자신의 주가 되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이란 주님을 주로 인정하며 그 분의 권위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은 주님의 말씀에 삶의 전 영역에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뜻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멘으로 화답하며 순종할 수 있는 길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영역은 어디인가요?
1) 가정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엡 5:33).
가정 생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정은 소중한 보금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주인되심은 성경적인 가치로 가정을 세워가는 것이며, 세속적인 가치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정을 보호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서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 했을 때가 아버님이 암으로 투병하실 때였습니다. 지금부터 25년전에 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되심을 강하게 고백하며 선포했습니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주인이 되셔서 보호하셨고 지켜주셨습니다.
2) 직장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게 하듯하여.” (엡 6:5).
직장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에 돈을 벌기 일을 하지만, 직장의 가치는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섬김으로 직장이 세워질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동료를 섬기고, 하급자를 존중해 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따라서 직장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물질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9).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삶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드리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삶은 믿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며 실천하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시대에 신앙의 적인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즉, 신앙이 세속화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세속화가 되어 가고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속화가 되어간다면,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능력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며, 순종하며,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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